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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수 마인드칼럼] 적당히 생각하면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기사승인 2020.10.31  0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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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타기 위해 시동을 걸면 엔진이 동작하고, 기어를 넣은 뒤 엑셀을 밟으면 차가 움직입니다.

힘이 만들어지고, 그 힘이 전달되고, 전달된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자동차의 기본 원리입니다. 우리삶도 그와 같습니다. 들은 이야기나 본 것들은 우리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보거나 들은 것들 가운데 무엇인가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마음에 받아들인 그것에 의해 몸이 움직입니다. 잘 살펴보면 주변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도 삶에 영향을 크게 미칩니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을 당하거나 불행하게 되는 이유는, 잘못된 것의 영향을 받거나 좋은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많은 사람들이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묻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율법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되물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에 기록된 내용들이 있는데, 그것을 이 방향으로 읽을 수도 있고 저 방향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표현입니다.

반 고흐가 그린 ‘강도 만난 자와 선한 사마리아인’ 그림.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의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한 것이 율법사가 한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되, 하나님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은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대화가 이렇게 끝났으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을 텐데, 율법사가 자기를 율법을 다 지키는 옳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율법사가 자기 몸처럼 사랑할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대답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이며,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려두고 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해 가고, 한 레위인도 피해 갔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던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가 타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며 그를 돌보아 주라고 하고, 돈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고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언젠가 제가 ‘운전하면서 멈춤 신호 때 기다리는 시간을 아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운전석 옆에 성경을 펴놓고 멈춤 신호 때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빵빵”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신호가 언제 바뀌었는지, 제 앞에 있던 차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 차가 도로에 서서 주행을 막고 있었기에 뒤의 차가 클랙슨을 울린 것입니다. 신호가 바뀌는 것에 신경을 쓰면서 성경을 보려고 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 내용에 빠져들어 운전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해보다가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이러다가 사고를 내겠다’ 싶어 그만두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생각처럼 안 되듯이, 운전할 때는 운전에만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면 운전이 안 되고,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웃이 배가 고플 때 나는 배가 고프지 않고 이웃이 아플 때 나는 아프지 않은데, 어떻게 이웃을 내가 배고프거나 아플 때처럼 위해줄 수 있겠습니까? 도와줄 수는 있지만 내 몸처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안 해서 그렇지,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을 적당히 했지 끝까지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략적으로 이해가 되면 ‘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 하며 쉽게 ‘긍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또 그렇게 하면 이루어질 줄로 압니다.

율법을 보는 다른 눈과 율법사의 오만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한 ‘율법을 어떻게 읽느냐?’는 말은 율법을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읽었지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율법을 읽는 다른 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율법사는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겠노라고 했지만,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율법사는 어떤 모습으로 이야기에 등장했습니까? 강도 만난 자입니다. 율법사를 비롯해 인간은 다 강도 만난 자처럼 죄에 사로잡혀 죽어가고 있으며, 예수님이 그 인간을 당신의 몸처럼 사랑해서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사는 자신이 예수님의 위치에 서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까?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고 가르치면서 살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어느 정도 지킨 것을 가지고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왜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갔습니까? ‘이 근처에 강도가 있는 것 같은데 나도 잡히면 저렇게 되겠다!’ 하고는 얼른 피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자를 도우려면,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그를 도왔고, 자신의 것을 그에게 다 주었습니다. 율법사는 이렇게 할 수 없으면서도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겠다며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끝까지 생각하지 않고 적당히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는 율법이 말하는 그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매일 율법을 어기는 사람인데도,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깊지 않으면 누구나 착각에 빠져서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마약에 빠진 사람이 그것을 끊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이걸 좋아해서 그렇지 끊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끊을 수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제 술을 끊어야겠다!’ 하거나 ‘도박을 그만둬야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술이나 도박이나 마약을 끊는 사람은 드뭅니다. 담배를 끊으려고 하는 사람이 ‘오늘만 피우고 내일부터는 안 피운다!’ 하고, 마지막이라며 담배를 평소보다 더 많이 피웁니다. 그런데 다음날 담배가 끊어지지 않으니까 오히려 피우는 담배 양만 늘어납니다.

사고를 얕게 하는 사람은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해봅시다.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고, 무성한 잎이 있고, 꽃이 있습니다. 나무는 그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를 나무를 보는 것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면, 어떤 사람은 멀리서 보고 ‘저기 나무가 있네’ 하는 정도에서 생각을 그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가까이 가서 ‘저 나무의 줄기가 튼튼하고 꽃이 예쁘네’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까이 가서 ‘이 나무는 잘 자랐지만 벌레가 먹은 잎들이 있네’ 합니다.

 

생각이 얕은 사람은 쉽게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끝까지 생각해서 결론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잘될 거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어떤 일의 결론을 알지 못한 채 ‘열심히 하면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적당히 아는 것으로 다 아는 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만나고,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살아 보면 자신이 똑똑하다는 소리, 잘났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아직 안 해본 사람이 큰소리치지, 해보면 정직하다는 소리나 거짓말을 안 한다는 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어떤 문제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자신이 잘난 줄 알았다가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 속에 있는 세계와 실제 세계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생각이 깊지 않아서 자신이 잘났거나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대로 배우질 못합니다. 대충 알고도 다 안다고 여기고 잘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굳이 배울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충 아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멀리서 나무를 보고 ‘저 나무 참 좋네’ 해도, 가까이 가서 보면 벌레 먹은 잎들도 많고 마른 잎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연구하고 조금 지킨 것으로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율법사처럼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때 행복해집니다. ‘내가 이렇게 거짓된 인간이구나. 진짜 못난 인간이구나.’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면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우다 보면 그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고 배우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끝까지 생각해서 ‘내가 이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삶의 태도가 바뀝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바로 알면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해가 되는 것은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배우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한 번 배우고, 두 번 배우고, 그렇게 하면서 생각이 점점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누구든지 제대로 배우면, 자기 생각 안에서만 살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글쓴이 박옥수
국제청소년연합 설립자이며 목사, 청소년 문제 전문가, 마인드교육 권위자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이 흘러가는 길, 곧 성경에서 찾은 마음의 세계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소명이라 생각한다. 마인드북 시리즈로 <나를 끌고 가는 너는 누구냐>를 비롯해 총 5권을 집필했으며, 최근에는 <마인드교육 교사를 위한 전문가 과정>을 출간했다.

박옥수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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