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기대며 사는 행복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불화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뒤에 다시 깃들 평화를 믿기 때문이다.

마음은 인체의 어디에 위치하는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매우 정교하고 세밀하며 무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마음 안에는 서로 부딪히는 본질적인 성향이 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서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자기중심적 성향’과 누군가와 더불어 살고 싶어 하는 ‘공감 성향’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중심적 성향과 공감 성향은 양팔저울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더 무거운 쪽으로 기울어진다.

만약 내가 가정, 학교, 직장, 동아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다면, 함께하는 것이 더 좋아서 자기중심적 성향을 잘 제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크고 작은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면 자기중심적 성향을 내려놓아야 하고, 자기중심적 삶을 유지하려면 외로운 고립을 감내해야 한다. 둘 다 가질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이다.

사이좋게 사는 줄 알았는데 등 돌려 순식간에 남남이 되는 커플들이 있다. 하루라도 안 만나면 난리가 날 듯 붙어 다니다가 갑자기 멀어지는 친구들도 더러있다. 한쪽이 잘못해서 갈라서는 경우도 있지만, 자아가 너무 강해서 공생과 공감이 아예 안 되는 사람도 있다. 미래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그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언급했듯이, 21세기에는 다른 사람의 상황과 기분을 느끼고 이해하며 생각과 경험을 함께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중요한 인간 본성이라고 한다. 이 능력은 다른 사람과의 교류에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십 년을 혼자 사신 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린다던 후배가 며칠 전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일흔두 살의 아버지가 최근 재혼하셨고, 행복해하셔서 정말 기쁘다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후배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다면 금슬 좋은 노부부가 결혼기념일에 찍은 사진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매로 선을 보고 결혼한 신혼부부였다. 결혼 너머에는 서로 ‘다름’에서 오는 불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분들도 그 사실을 잘 안 텐데 또 다른 출발을 선택한 것은 ‘고독’이라는 벽을 마주한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함께할 수 있다면 다소의 불평을 유발시키는 자기중심적 성향쯤은 버리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마음이 하늘처럼 드높은 사람은, 스스로 잘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불화가 진을 친 들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기대며 사는 행복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불화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뒤에 다시 깃들 평화를 믿기 때문이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작은 나라 조지아에는 “우정과 불화는 한 형제다”는 속담이 있다. 함께 사는 한, 화합과 불화는 필연이라는 뜻이다. 우정은 그처럼 서로 다름의 다리를 건너서 이해와 공감의 강가에 다다른다. 우리에겐 인생을 같이 걸을 친구가 꼭 필요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간은 혼자보다 함께일 때 더 행복하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진리이다.

글=조현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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