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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아픔 끝에 찾은 삶의 의미, 감사

기사승인 2020.12.21  1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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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시작

고등학생 시절 나는 누구보다 씩씩한 학생이었다. 운동도 곧잘 했기 때문에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시작됐다. 심한 두통 탓에 음식도 먹는 대로 게워냈다. 증상이 점점 심해져 병원에 찾아가 척수염이란 진단을 받았다. 뇌와 팔다리의 신경을 관장하는 척수에 염증이 생겨서 몸에 마비가 오고 감각을 잃어가는 병이다. 병마는 순식간에 내 몸을 덮쳤다.

이마의 세로 3cm를 제외하고 모든 신경이 마비됐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없고, 한쪽 시력과 청력도 잃어갔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병원에서는 완치된 사례가 없다며 평생 걷지 못하고 누워서 지낼 거라고 했지만, 의사들도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휠체어로,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두 다리로 뛸 수 있다는 게 그토록 벅찬 일인지 몰랐다. 다리에 어느 정도 힘이 생긴 후로는 단축마라톤 대회에도 나가고, 인생을 가치 있게 쓰고 싶어서 해외봉사활동도 떠났다. 집 앞을 산책한다든지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더없이 소중해졌다.

그런데 인생에 어려움이 한 번만 오는 건 아니었다. 앞으로의 삶을 감사히 여기며 살겠노라고 다짐했건만, 갑작스러운 병에 나는 또 넘어졌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2011년,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 암이 온 몸에 퍼져 있었다. 위암 말기를 비롯해 곳곳에 전이된 암으로 길어야 7개월을 살 거란 판정을 받았다. 머리끝부터 발가락까지 퍼진 암 때문에 몸이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진통제를 맞고서야 겨우 5분 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정말 죽고 싶었다.

엄마는 나에게 “괜찮아.”라고 했다. 딸이 아프다고 하면 걱정해 주거나 쉬게 해주는 게 정상인데, 엄마는 나에게 괜찮다고, 멀쩡하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하면 나에게도 똑같이 들게 했고,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해 먹자마자 다 토하면 다시 음식을 만들어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또 이야기하셨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루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가 보기엔 내가 정말 괜찮냐고.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수현아, 엄마도 딱 죽고 싶었어. 네가 아플 때마다 가슴이 찢어져서. 그런데 엄마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어떤 때는 아픈 너를 데리고 병원에 갈 차비조차 없었으니까….”

엄마는 이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내 병을 막을 힘이 없는데 그렇다고 대신 아파줄 수도 없는 현실, 병원에서 검사하면 이곳도 수술해야 하고 저곳도 절단해야 한다는데 결국엔 살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고.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곧 죽을 딸을 불쌍히 여기며 사는 게 아니라 우리 딸이 살아 있다고, 더 건강하게 살 거라고 믿는 것밖에 없었다고. 엄마의 말은 한동안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왜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살았지? 지금도 살아 있는데….’ 그리고 엄마 말처럼 생각을 고쳐먹었다. ‘괜찮아, 아무거도 아니야. 난 앞으로도 살 거야.’

처음에는 배에 차오르는 복수를 빼는 것도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복수를 빼며 만난 환자들이 유명을 달리해 점점 주는 걸 보니, 복수를 빼는 것마저도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복수를 빼는 시간마저 기다려졌다. 죽음은 언제나 내 가까이에 있었지만 결국 나를 덮치진 못했고, 2014년 5월 9일에 후유증만 남긴 채 암은 하나도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아픔 끝에 배운 것

병치레를 하기 전에는 일상적인 일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어떤 것에도 감사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매사에 불만투성이라 매일 투덜거렸다. 하지만 척수염이 발병했을 때 영문도 모르고 시작된 심한 두통과 구토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았고, 신체 마비로 1년 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 신경이 살아 움직이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알았다.

스스로 일어나서 걷고 뛸 수 있다는 것, 목이 마를 때 스스로 물을 따라 마실 수 있다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소화시킬 수 있다는 것 등등이 새삼스레 감동으로 밀려왔다. 굳어 있던 발가락이 다시 움직였을 때와 내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게 하는 게 느껴졌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때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를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다.

내 곁에 항상 있어주는 엄마와 부쩍 웃을 일이 많아졌다. 함께 산책을 하는 순간에도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잊어버린 시간 속에서

참 이상한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아침이었는데, 아침에 핸드폰을 놓고 나와 하루 종일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다음날도 이상한 날의 연속이었다. 지갑을 두고 나왔고, 어디를 가려고 했는지 한동안 기억이 나지 않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모든 기억을 잃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TV를 켤 수도, 핸드폰을 할 수도, 글씨를 읽을 수도 없어서 정말 바보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함께 있는 엄마만 졸졸 따라다녔다.

‘꼬마 최수현’은 엄마가 주방에 가면 따라가고, 씻으러 욕실에 가도 따라가고, 엄마밖에 모르는 어른 아이가 되었다. 집 밖을 나갈 수도, 누구와 연락할 수도 없는 상태로 3개월을 집 안에만 있었다.

기억상실이 시작된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부터 핸드폰과 노트북 사용법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핸드폰 안에 저장되어 있는 낯선 사람들의 이름과 그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확인하고 어떤 관계였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자고 나면 다시 기억이 지워지곤 했다. 옆에 누워 있는 엄마가 너무 낯설어서 눈도 못 마주치는 시간이 반복됐다.

기억을 잃고 난 뒤 5개월 만에 첫 외출을 했다. 밖을 나서니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만 보고 살던 세상과는 또 달랐다. 그리고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알아보지 못하자 당황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나는 용기를 내어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파서 기억을 잃었습니다. 저랑 어떻게 아는 사이였는지, 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혹시 함께 찍은 사진이나 기억했으면 하는 추억이 있다면 이 번호로 보내주세요.” 만나는 사람에겐 이렇게 말을 건네고, 만나지 않았지만 폰에 저장된 사람들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기억을 잃는다는 건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었다. 기억을 잃은 나 스스로가 참 미웠다. 그렇게 2년 정도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피해 숨어 지냈다.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 나는 되풀이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고 지냈다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기억을 못해 당황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매일 기억을 잃으며 지내다보니 그런 삶이 어느새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내 삶을 다시 규정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났어. 매일 새로운 시간을 선물 받고,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 새로운 일들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다신 기억나지 않으니 가장 행복하게 보내자.’라고. 더 이상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조금씩 발을 떼어 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나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나와 마주하는 모든 사람,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그리고 더 감사한 것은, 잊혀질 준비를 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었다.

잊혀지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늘 만난 시간이 사라진다 해도 나와 마주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기억이란 선물

지금은 기억을 잃지 않고 산 지 1년 정도 되었다. 기억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다. 특히 더 좋은 것이, 작년 3월에 오빠가 결혼하면서 생긴 새로운 가족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새언니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매일 기억을 잃던 중이라 새언니를 만날 때마다 새롭고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은 친언니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더욱 감사한 건 새로 태어난 조카를 기억하고, 조카와의 영상통화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날마다 느끼고 있는 중이다. 기억을 잃어보고 알게 된 게 있다면, 기억과 상관없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와 행복’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감사로 향하게 하는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시작

요즘엔 아침에 일어나 가야 할 곳이 생겼다. 올해 내게 일어난 가장 큰 이슈는 ‘직장을 다닌다’는 것이다. 10대의 끝부터 20대 전부를 병상에서 보낸 나에게는 출근이라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대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회사로 향하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평범한 하루를 보낸 것이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내 몸은 여전히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며 변하고 있다. 너무 아파서 출근을 못 하는 날도 있고, 늦은 시간까지 밀린 업무를 끝내느라 퇴근을 제때 못 할 때도 있다.

가끔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가 근무시간 내내 밀려오는 통증에 고통할 때도 있지만, 내게 주어진 업무를 해내고 나를 기다리는 직장에 가는 것 자체가 어찌됐든 행복하다.

결국엔 감사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나는 오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삶과 얼마나 깊은 관계인지를 배웠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게 됐으며, 누굴 만나든 최선을 다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느끼는 감사는 아마도 모든 게 불가능했던 시간을 보내며 배웠을 것이다. 때로는 의사의 절망적인 한마디에 깊은 물속으로 잠수했다가도 엄마의 사랑에 헤엄쳐 나오고, 기억하지 못해도 만남 자체가 헛수고가 아니라 말해주던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내가 만약 건강하기만 했다면, 내게 어려운 시간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툴툴대며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따금 새로운 고통을 느낀다. 얼마만큼의 고통이 더 찾아왔다 갈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나는 이로 인해 또 다시 감사의 조건을 찾을 것이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고통 없이 감사를 배우면 좋겠다. 휴지가 물에 닿으면 순식간에 젖듯이, 부족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독자들이 감사에 젖어들면 좋겠다. 고통을 겪으며 배우는 감사는 꽤나 아프기에, 모두 아프지 않고 감사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최수현

최지나 기자 4153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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