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년에 첫 직장에 입사했다. 직장 근처에서 하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내가 사는 곳에는 나 외에 4명의 대학생 동생들이 있었는데, 동생들은 이곳에서 함께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였다. 내가 재택을 시작할 무렵, 동생들도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나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동생들과 지내야 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며 내가 느낀 걸 이야기하자면 첫째, 예의가 없다. 둘째, 배려심이 없다. 셋째, 나를 무시한다.

나보다 세 살이 어린 동생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많이 했다. 새로 들어온 나에게 의견을 묻기는커녕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룰에 맞추라고 했고, 같이 사는 동생들 눈치를 보고 사는 내가 너무 한심해 보였다. 여러 번 대화를 시도한 끝에 조그마한 갈등들은 해결되는 듯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문제가 반복되었다. 나는 불만들을 하나둘 마음에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인내심에 한계가 왔고, 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랑 함께 지내면서 내가 항상 눈치 보는 거 알아? 내가 왜 너희 눈치를 봐야 돼? 날 자꾸 무시하니까 너네랑 같이 있어도 난 항상 혼자인 것 같아.” 내 말에 돌아오는 답변은 이러했다. “언니, 저희는 언니가 혼자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실 때 정말 서운해요. 저희가 잘못한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언니는 이미 저희가 뭘해도 언니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언니의 기분이 어떤지 걱정되기도 하고, 언니랑 잘 지내고 싶은데 언니가 자꾸 혼자 있다고 말할 때 저희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서운해요.”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내가 오해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으니 더 화가 났다. “미안한데, 나는 솔직히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너희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게 아닐까?”

대화를 마치고 화가 풀리기는커녕 더 커졌다. ‘아니,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자기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맞는 거야!’ 더 이상 대화가 안 통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닫고 지내니,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KF94 마스크를 쓰고 마라톤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러다 내 생각의 과정에 아주 조금의 의문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게 틀릴 수도 있는 걸까?’

인터넷에 내 상황을 검색해보았다. 그러자 나온 단어. ‘(편집성 성격장애) 피해의식’. ‘에이, 나는 그것까진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은 궁금한 마음으로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의 사례를 인쇄해서 나일 수 있다는 부분에 형광펜으로 칠해 나갔다. 어느새 종이는 주황 형광빛으로 가득했다. 나의 상황과 소름 끼치게 똑같은 몇 개의 문장을 여러 번 읽어보았다.

1.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은 다른 관점으로는 보지 못한다.

2.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은 상대방이 악의적이었을 것이라고 확정짓기 때문에 만성적인 분노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3.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정보가 자신에게 악의적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공포로 인해 터놓고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위 내용들을 읽고 내 상황을 다시 바라보았더니, 너무 달랐다.

1번, 내가 작업하다가 늦게 들어왔는데 전등을 꺼놓은 것을 보고 동생들이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관점으로만 보고 있었지, 나를 위해 이불을 깔아준 따뜻한 마음은 보지 못했다.

2번, 나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동생들끼리 밖에 나가서 식사하고 오는 것을 보며 나랑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악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 업무에 방해될까 봐 그런 것이었다.

3번, 나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언니 같아 보이지 않을까 봐 터놓고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내가 좋으면 좋다, 어려우면 어렵다고 표현할 때 고마움을 느끼는 동생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사실들을 확인한 후, 정확히 내가 피해의식에 빠진,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피해의식은 나의 26년을 괴롭게 만든 생각의 장애였다. 내게 피해를 ‘입힌’ 사람보다 나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어쩌면 받지 않았을 생각 속의 ‘피해’만을 의식하는 동안, 내가 확실히 받아왔던 ‘감사’를 의식하지 못했다. 이것을 발견한 후 내 주위에서 감사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코로나 덕분에 숙소에 새롭게 만난 동생들을 깊게 사귈 수 있어서, 내 마음의 문제를 동생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내 모습을 알게 되니 지금까지 나를 지켜봐 주고, 이해해 주었던 분들이 있었음에 감사했다. 내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사랑 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스크를 쓰기 전엔, 눈에 보이는 외모를 가꾸는 데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면, 매일 챙겨 쓰는 이 마스크 덕분에 지금까지 크게 여기지 않던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여전히 나는 보이는 외모와 행동을 중요시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과 사랑은 무시하고 살았을 것이다. 코로나가 준 마음 점검 시간. 나는 이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닌, 하루에도 흘러넘치는 ‘감사’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글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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