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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손해 본 시간들이 만들어준 행복

기사승인 2021.07.13  09: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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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났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하며 결혼했다. 그 후 동화 속 이야기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2020년에 발표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이혼이 10만 7천 건이었다. 혼인이 21만 4천 건이었으니, 혼인 건수의 절반만큼 이혼했다는 것이다. 이혼이 아니더라도 직장, 가치관, 경제적 어려움, 건강 문제 등으로 함께할 수 없는 이유나 행복할 수 없는 이유는 넘친다. 그 이유들을 듣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네’ 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표지에 “내 삶의 주어가 나에서 그녀로 바뀌는 순간, 가려졌던 아내가 내게로 왔습니다”라고 적힌 책을 보았다. 부부 사이라도 손해 보며 살지 않으려고 하는 때에, 삶의 주어를 아내로 바꾼다니…. 어떤 남편이,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적었는지 궁금했다. 책 안에는 남편을 위해 손해를 마다하지 않은 아내가 있고, 아내가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를 바라본 남편이 있었다. <아내수업>의 저자 김준범 작가에게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결혼을 하자마자 아내를 두고 먼저 폴란드로 떠나셨다고요. 먼저 폴란드로 떠난 남편과 뒤따라 폴란드로 향한 아내의 마음은 좀 달랐을 거 같아요.

2007년 1월에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제 나이, 만으로 서른 살이었죠. 첫 직장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6년 간 일하면서 ‘내가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해외 주재원 제안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유럽에서 살 생각을 하니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더 컸습니다. 그래서 바로 폴란드로 떠났죠. 들뜬 저에 비해 아내는 차분했습니다. 아내는 저와 결혼함과 동시에 평생 살아온 한국을 떠나야 했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함께 살던 부모님과도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거기에다 같이 한 달도 채 살지 못한 신혼집도 혼자 정리했어요. 저는 직장 일정에 맞춰야 한다는 이유로 먼저 떠났거든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으로 가기까지 아내는 어떤 불평도 없이 제 결정을 따라주었습니다. 그 결정에 아내를 위한 자리는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제가 너무 늦게 알았지만요.

그렇게 시작한 폴란드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회사에서 일만 했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저만 기다렸죠. 아는 곳도 별로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폴란드에서 집 밖으로 나서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고 하네요. 설상가상으로 하루는 아내가 트램을 타고 시장을 다녀오다가 노상강도를 만났어요. 강도들은 아내의 핸드폰을 뺏으려 했고, 아내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힘을 쓰다가 결국 핸드폰이 두 동강 났어요. 전화기가 고장나 저에게 연락도 못하고, 길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신혼의 달달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럽의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하고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아내가 유독 힘드셨을 거 같아요.

결혼하고 유럽에 살았던 7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아내는 제게 모든 것을 맞췄습니다. 전 회사만 바라보았고, 아내는 저만 바라보았죠. 그리고 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유럽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고, 그렇게 일하는 게 가족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늘 당당하게 소리쳤어요.

‘내 덕에 유럽에 살고 있으니 고마워하라’고 말입니다.

이 외에도 결혼 초기에 기선을 잡으려고 주장했던 것들이 아내에게는 많이 상처가 됐을 겁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로 아내의 희생을 당연시했습니다. 참, 밥맛없는 남편이었죠? 일방적인 요구를 하는 남편 말고는 이야기할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아내는 독박 육아를 하며 철저하게 혼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몸이 아파 찾은 병원에서 난소암이란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암 판정을 받은 아내와 함께 폴란드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셨지요? 그 결정도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내의 건강이 그런 상황이 될 동안, 저는 한 번도 아내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어보니 이혼까지 생각했다더군요. 그 순간 먼저 떠난 형이 생각났어요. 아내마저 형처럼 세상을 떠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아내 혼자 병실에서 병마와 싸우게 둘 순 없었거든요.

한국으로 갈 이삿짐을 싸는데, 7년 전 한국에서 이삿짐을 쌌을 아내의 모습이 상상됐습니다. 참 쓸쓸했겠구나 싶기도 하고…. 그 와중에 아내의 살림 도구와 옷가지 몇 벌을 보는데, 그 집에 아내 물건은 거의 없다는 게 참 미안했습니다. 아내가 아프고 나서야 아내에게 눈을 돌렸다는 게 부끄러웠지만, 더 늦지 않게 아내를 향해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아내의 병간호를 시작했다. 다행히 아내는 점점 건강을 회복했고, 작년 1월에는 5년간 싸웠던 암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차근차근 남편의 자리를 되찾고 아빠의 영역을 만들어갔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집안일을 하며 아내의 노고勞苦를 이해했고, 가장으로서 가정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표지에 ‘삶의 주어가 나에서 아내로 바뀌는 순간’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삶의 주어를 바꾸니 무엇이 보이던가요?

아내가 보였습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노래를 잘 부르는지, 어떤 영화배우를 좋아하는지 하나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궁금한 것도 생겼습니다.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물어보니, 자연스레 아내의 학창시절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는 꿈도 말하더군요. 어린 시절 피아노가 너무 배우고 싶어서 엄마에게 졸라 피아노 학원을 다녔지만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던 것이 서러웠다는 기억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게 생기면 꼭 해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는 것도요.

그 다음에 보인 게 나였습니다. 뭐든 제 기준으로 아내의 행동을 판단하고, 지적하고,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요.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아내의 생각이 나와 다른 것이 당연한데, 나와 다르니 틀렸다며 고치라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내의 속이 얼마나 상했을지, 얼마나 답답했을지 보이더라고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내를 이해하면서 생긴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좋은 직장, 높은 연봉, 사회적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 생각했다면, 지금은 옆에 있는 행복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게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요.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그리고 건강한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작년에는 육아휴직을 내고 1년 간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온 가족이 유럽으로 자동차 여행을 가기로 계획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계획으로만 끝났어요. 하지만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이곳에서 알차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와 산책을 하고, 매일 밤 온 가족이 모여 독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베란다 백일장’을 열어 자신이 쓴 자작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주말이면 ‘역사여행’을 떠났습니다. 경주와 수원 화성, 강화도 마니산 등 우리나라의 역사를 느껴볼 수 있는 곳도 가보고 제 고향인 예천의 금당실 돌담길도 다녀왔습니다. 가기 쉽지 않은 울릉도와 독도에 찾아가 우리나라의 가장 동쪽 끝에 서보기도 했고요. 사실 육아휴직으로 1년 연봉이 사라졌지만,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추억을 쌓을 줄도 알게 됐으니. 이것도 큰 변화네요.

아내가 남편만 바라보며 산 시간이 지금의 결과를 낳은 것 같아요. 7년의 시간이 손해 본 듯해도 손해가 아니었네요.

아내는 유럽에서의 7년뿐만 아니라, 아내이자 엄마로서 15년간 자신의 모든 시간을 흔쾌히 내주었습니다. 워킹 맘으로 일하며 자녀를 키우는 친구들이 멋있다며 부러워했던 아내였지만, 지금은 손해 보면서 사는 삶이야말로 진짜 내 편을 만드는 멋진 일이라고 믿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저에게 아내가 주변을 돌아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주변 분들의 생일을 챙겼습니다. 매달 두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는 일도 잊지 않았습니다. 얼굴만 알고 지내던 분들에게 인사도 건네고 진심으로 축하를 전했죠. 사실 휴직 중이라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적은 돈으로 선물을 하려니 더 신중하고 진지하게 상대방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선물을 고르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더니, 올봄 제 생일에 정말 많은 축하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놀랐습니다만, 행복하더군요. 이렇게 사는 게 진짜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김준범 작가는 가족사진을 보내왔다. 푸른 바다가 매력적인 동해에서, 바다 물결에 반짝이는 햇볕 같은 웃음을 지은 사진이었다. 여기에 담긴 웃음은 동해의 아름다움 때문도, 예쁜 카페였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기자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사진의 바탕에 깔려 있는, 아내가 손해 본 시간들과 남편이 손해 본 시간들이 말이다.

김준범

경북 예천 금당실에서 태어난 그는 김천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훈련 중 부상을 입고 육군 소위로 전역하여 건설회사, IT 개발자, 포스코 폴란드 관리팀장, 독일 기업 관리담당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잠시 일에 쉼표를 찍었다가, 현재는 포항공과대학교 직원이면서 포스코에 파견 중이다. 아내와 대화, 독서, 산책, 여행을 즐기며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블로그와 유튜브 ‘시니차니’에 기록하며 새로운 책을 준비하고 있다.

최지나 기자 4153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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