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세종병원 류은주

지난 주, 감기로 병원을 찾았다. 코로나 백신 접종으로 병원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코로나 증세와 비슷하다는 진단을 받고 바로 코로나19 선별 진료소로 향했다. 도착한 진료소에는 병원에서보다 더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과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 있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가 코로나로 많은 진통을 겪고 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힘을 쏟아 일하는 의료진을 보며 감사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류은주 씨를 만났다. 심장 전문 의료기관인 부천세종병원에서 9년차 간호사로 근무중인 그녀는 어느 때보다 바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류은주 씨를 만나 바쁘고 값진 일상을 잠깐 동안 엿보았다.

연락이 닿아서 만나기까지,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요즘 바쁘시죠?

근무하는 동안에는 개인적인 전화를 받지 못해서 제때 연락을 못 드렸어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현재 부천세종병원 외과 병동에서 주임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생한 작년 초에 비해 지금은 병원 체계가 많이 잡혀서 비상 상황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복잡한 일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병원은 아픈 환자분들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코로나바이러스뿐 아니라 혹시 모를 감염에도 각별히 주의해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요즘엔 외부인 면회가 전면 금지되어 간호사가 보호자들과 환자들 사이를 조율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면회를 금지하는 게 매정해 보이겠지만, 따뜻하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하하).

외과 병동에서 한 팀으로 일하는 간호사들과 함께. 사진 앞줄 맨오른쪽이 류은주 씨다.
외과 병동에서 한 팀으로 일하는 간호사들과 함께. 사진 앞줄 맨오른쪽이 류은주 씨다.

간호사가 하는 일이 상당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생명과 관련된 일을 하기에 긴장도 많이 될 것 같아요.

환자 분이 입원하는 순간부터 퇴원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간호사가 개입해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치료를 행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면 업무가 과중될 때도 있어요. 종종 환자분의 상태가 갑자기 위중해지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해요. 제가 간호사로 일한 지 3년째일 때 담당했던 환자가 일반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간 적이 있어요. 그때 제 마음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왔다 가더군요. ‘내가 뭘 놓친 건 아닐까?’, ‘나 때문에 중환자실로 가신 건 아닐까?’ 하는 자책과 함께요.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게 일하려고 합니다. 일하는 동안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을 놓지 않는 것까지도 저는 간호사의 업무라고 생각해요.

2010년 말라위에 온 의료봉사단의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은주 씨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환자들에게 어디가 아픈지 묻고, 정확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일을 맡았다.
2010년 말라위에 온 의료봉사단의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은주 씨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환자들에게 어디가 아픈지 묻고, 정확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일을 맡았다.

특별한 사명이 없다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사실 간호학과에 입학할 때만 해도 대단한 꿈이나 사명은 없었어요. 그냥 제 점수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에 맞춰서 진학했죠. 그러다 보니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수업을 겨우 따라가는 정도였거든요. 1학년을 마치고 ‘앞으로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생겼고, 그러던 중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을 알게 되었어요. 잠시 학업을 내려놓고 진로 고민을 해볼 요량으로 말라위를 향해 봉사를 떠났죠.

그 당시 말라위는 UN이 지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어요. 1년간 그곳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갔는데, 가서 보니 말라위는 가난하다고 규정하기엔 마음이 너무나 부유한 나라였어요. 말라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가난한 나라가 아닌 따뜻한 심장Warm heart of Africa을 가진 나라로 여겨요. 누구를 만나든 ‘보보Bobo’(안녕)라고 인사하고, 어려운 이웃이 생기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사람들이었죠. 그런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좋아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불평 없이 지낼 수 있었어요.

그렇게 지내던 중 말라위로 의료 봉사를 온 한국 의료진을 만났어요. 간호과를 다닌다는 이유로 의료 봉사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사실 제가 맡은 역할은 간호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업무였어요. 말라위 사람들과 한국 의료진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과 길게 늘어진 줄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거든요.

그때 환자들을 돌보는 의료진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처음 봤어요. 병원이라고 할 수 없는, 시멘트로 기초만 다진 곳이 의료진 때문에 순식간에 병원으로 탈바꿈했어요. 성심성의껏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덕분에 차디찬 공간은 어느새 온풍으로 따뜻해졌죠. 대단한 수술을 하거나 비싼 약을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돌보고자 하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심장이 뛰더라고요. 그 경험이 있었기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며 공부할 수 있었어요.

말라위에서 만난 현지 친구들과 함께한 모습 .
말라위에서 만난 현지 친구들과 함께한 모습 .

갈 수도 없고 먹을 약도 충분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때 저를 돌봐주던 주변 사람들에게 괜히 짜증을 냈어요. 마음은 고마운데 표현을 왜 그렇게 했는지…. 저도 그랬던 적이 있는 터라 환자들이 더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리고 말라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말라위 친구들이 저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었어요. 그 가운데 한 친구가 항상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가 있었어요. 그 친구에게 “이거 너한테 소중한 거잖아” 하며 다시 돌려주려고 했더니,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저에게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손목시계를 받았지만 저는 그날 그 친구의 전부를 받은 것 같았어요. 그게 제 마음을 얼마나 따뜻하게 해주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저도 저를 만나는 환자들에게, 별것 아니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전부를 드리려고 해요. 대단하고 좋은 것을 줘야만 상대가 고마움을 느끼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자책감에서도 벗어나 있더라고요.

해외봉사를 하면서 의료 봉사에 동참했던 그 경험이 은주 씨를 간호사로 만들었네요.

맞아요. 말라위에서 보낸 시간은 제가 간호사를 할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붙잡아줍니다. 일하다 보면 보호자나 환자들에게 상처를 받을 때도 있고, 부족한 제 모습을 자책할 때도 생겨요. 힘들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찾아오고요. 그때마다 말라위에서 지냈던 시간을 생각해요.

저도 말라위에서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어요. 왜 아픈지 이유도 모른 채 며칠간 앓아누워 있었는데, 그 상황이 참 힘들더라고요. 몸은 너무 아픈데 병원에 그렇게 일하신 지 어느덧 9년째입니다. 보람을 느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환자들이 고맙다고 표현해 주실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종종 음료수나 롤케이크를 주면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런 걸 주지 않아도 “밤 새우느라 힘드시죠. 수고가 많아요”라든지, “주사를 안 아프게 놔주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너무 고마웠어요”라든지, 그냥 그런 말들을 들으면 힘이 나요. 그리고 입원할 때는 응급차에 실려올 만큼 아팠지만 퇴원할 때 건강을 되찾고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면 괜히 뿌듯하고 감사해요. 다행이다 싶고요. 그런 환자에게 저는 허물없이 “다시는 아프다고 병원에 오지 마세요”라고 인사드려요.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친구들에게 음계와 음표를 가르쳐주고, 어느 건반을 어떻게 눌러야 맞는 소리가 나는지 알려주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친구들에게 음계와 음표를 가르쳐주고, 어느 건반을 어떻게 눌러야 맞는 소리가 나는지 알려주었다.

최근에 어느 환자분에게서 장문의 편지를 받았어요. 이래서 고마웠고 저래서 고마웠다는 말이 가득 담긴 편지를 읽는데, 지금까지 고생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단번에 받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동기 부여도 됐고요.

간호사로서 더 멋지게 성장할 모습이 기대됩니다.

예전에는 업무가 많다는 이유로, 일하는 것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여력이 없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앞으로는 환자들의 마음까지 보듬어줄 수 있는 간호사로 성장하고 싶어요. 그래서 나중에 제가 환자들에게 ‘따뜻한 심장을 가진 간호사’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할 것 같아요.

직장인에게 꿀 같은 시간인 토요일 오전에 은주 씨는 인터뷰를 했고, 바로 병원으로 출근했다. 오늘도 그녀는 많은 환자를 만나 아픈 곳이 어딘지 살피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돌보고 있을 것이다. 처음 본 환자에겐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지친 환자에게는 곁을 내주며 말이다.

말라위 친구가 선물한 손목시계가 은주 씨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 것처럼 그녀가 건넨 인사가 환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길, 그리고 환자들이 ‘따뜻한 심장을 가진 간호사’를 만났었다고 그녀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취재 최지나 기자   사진 안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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