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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미래의 열쇠를 한국에서 찾다

기사승인 2021.12.06  08: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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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phane Zoro Bi Ballo 예피판 조로 비 발로 코트디부아르 장관

이태 전, 서아프리카에서 마인드교육 단기 연수를 받으러 온 수십 명의 교수진이 코로나에 발이 묶여 5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학생들을 변화시킬 공부를 하러 왔다가, 정작 배우고 있던 교수들이 일제히 바뀌면서 이 교육의 즉각적인 실효성이 입증되기도 했다. 이번에 공식 방한한 조로 비 발로 장관도 마인드교육이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예피판 조로 비 발로 코트디부아르 굿거버넌스 역량강화 부정부패퇴치부 장관
Ministre de la Promotion de la Bonne Gouvernance, du Renforcement des Capacités et de la Lutte contre la Corruption
1968년 생. 법학을 공부했고 판사로 일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벨기에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 그곳에서도 인권운동가로 계속 활동했으며 2004년 콩고 킨샤사로 옮겨 국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카터 센터 소장, 유엔 인권공동사무소 코디네이터,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법률 전문가로도 활동했다. 2011년 고국으로 돌아와 2016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올해 4월부터 장관으로 있다. 인권 회복을 주제로 두 권의 저서를 냈다.

회색 정장 차림의 조로 비 발로 장관이 단상 앞에 섰다.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로 연설이 시작되자, 수많은 청중이 그를 향해 귀를 세웠다. 울림이 점점 더해지는 그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

“코트디부아르와 한국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려고 정부 초청을 받아 한국에 왔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대륙 중에서 한국과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입니다. 저는 한국의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양국 관계를 재확립하는 행사를 했습니다. 오늘, 기독교지도자 포럼에서는 한 단체가 코트디부아르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 일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이어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정세가 불안해지자, 해외 파트너 기업과 단체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국제청소년연합이라는 NGO 단체는 철수하지 않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어려움에 함께 동참했습니다. 인종과 문화의 벽을 넘어 우리를 가족처럼 돕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남다른 정신이 어디에서 발현한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사실, 아프리카는 다이아몬드나 금, 석유 등 굉장히 풍부한 자원을 가졌으나 굉장히 가난한 대륙입니다. 이런 모순적인 양상은, 비정상적인 통로로 자원이 유출되거나 효율적인 자원 사용법을 몰라서 생기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우리가 빈곤과 불평등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국제청소년연합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마인드 변화 프로그램은 우리 코트디부아르에도 필요한 교육이었습니다. 마인드 변화가 아프리카를 빈곤에서 탈출시키는 비상구입니다. 저는 우리나라는 물론, 아프리카 전 대륙에 이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하 중략 -”

명료하고 확고한 연설에서 그의 신념과 삶이 그려졌다. 그가 왜 한국의 뛰어난 마인드와 시스템을 배우려고 하며 어떤 인생을 걸어왔는지, 우리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정중히 인터뷰를 청했다. 마침 그는, 며칠 전 아프리카 관련 단체를 방문했을 때 투머로우 잡지에 대해 들었다며 취재에 응해 주었다.

수백 명의 청중 앞에서 조로 비 발로 장관은 한국과 코트디부아르의 관계와 협업 현황에 관해 연설했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에서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진 편에 속하며, 해마다 경제가 7~8퍼센트씩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알라산 드라만 우아타라Alassane Dramane Ouattara 대통령은 국가의 미래를 외형적 성장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경제가 발전한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은 정신에 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정신을 찾아라.’

진시황은 자신을 위해 불로초를 찾았다지만, 우아타라 대통령은 오로지 국민을 위해 좋은 정신을 찾았다. 당시 총리실 산하 국가능력구축사무청 청장이었던 그는 이 미션을 받고 바로 한국을 떠올렸다. 

“저는 대통령께서 원하는 정신이 국제청소년연합 본사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과 함께 한국으로 왔고, 설립자를 만나 마인드교육에 대해 자세히 들었습니다. 교육 프로그램을 실제 적용하고 있는 링컨중고등학교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이 시대에, 인류에 대한 봉사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가르치고 개인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앞에 두는 수업을 보면서 그는 대통령이 찾고 있는 ‘좋은 정신’의 열쇠를 발견한 것이다.

“귀국 후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고, 마인드교육을 국가사업으로 하는 협약을 국제청소년연합과 체결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마인드교육이 각계각층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교사 양성에도 더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이로써 대통령이 구상하시는 ‘새로운 코트디부아르 국민’ 정책이 가시화되었습니다.”

‘위드 코로나’ 정책 시행으로 대면 인터뷰가 가능해졌고, 그래서 조로 비 발로 장관을 직접 취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현장감은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질문마다 깊이 생각하고 성심껏 답하는 그의 모습이 글 안에 그려지길 바라며 인터뷰 내용을 적는다.

그는 고향 생프라에 만든 농장에서 청년들이 마인드교육을 받아 바르게 성장해갈 날을 꿈꾼다.

양국 수교 60주년을 기념해서 한국에 초청을 받으셨는데 방문 성과는 어떠셨습니까?

우리 정부는 청렴 사회를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로 지난 4월에 새로운 부서를 설립했습니다. 신임 장관이 된 저는 공공 분야의 부정부패 척결에 디지털 기술이 접목되는 정책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와서 정부 여러 기관들을 돌아보았는데, 사법 서비스, 정보 서비스, 관세 서비스 분야의 디지털 정책이 좋았습니다.

특히 한국 정부의 반부패 제도가 모든 부처와 기관을 하나로 통합한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우리도 프로그램의 개발을 이런 방향으로 잡으려고 합니다. 반세기 동안 한국은 뛰어난 경제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우리에게 한국은 영감을 주는 나라이며, 국가 발전의 롤 모델입니다.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들춰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구상하고 있습니까?

부정부패와의 전쟁은 긴 투쟁입니다. 우선 디지털 정부의 시스템을 만들어서 부패의 위험을 줄여갈 겁니다. 제가 마인드교육이 코트디부아르 미래의 열쇠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부정부패가 문화의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정행위를 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행동할 때가 많거든요. 예컨대 신분증을 발급받을 때, 행정 처리를 해준 공무원에게 고맙다며 수고비를 주는 것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하지만, 법은 그것을 부정부패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상적인 관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소소한 부정부패가 모여 우리 경제를 파괴하고 안보를 약화시킵니다. 경찰은 돈을 받고, 운전자는 검문을 피합니다. 학생은 돈을 주고 졸업장을 받고,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채용해주는 일들이 흔해집니다. 코트디부아르가 새로워지려면 의식, 즉 마인드 변화가 필요합니다. 마인드가 변하지 않으면 부정행위의 기술은 더 치밀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디지털 정부 구축과 동시에 마인드교육 프로그램을 모든 학생과 성인들에게 실시하려고 합니다. 두 대상이 교육을 같이 받지 않으면, 학생들이 배운 교육과 반대된 행동을 하는 어른들을 보고 학생들은 자신이 배우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학부모, 고위 관리직, 직장인들도 학생들과 동일한 내용을 배워야 합니다.

2004년에 출판한 책 <코트디부아르 판사, 폭력을 무장해제하다> 판사의 경험을 기반으로 인권과 망명시절을 기록한 자서전적인 내용이다. 사진에는 없지만 두 번째 저서 <여성 수감자 아디에리>는 콩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청렴하고 투명한 사회를 위해 열정적인 장관님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어렸을 때부터 매사에 적극적이셨나요?

13남매의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식구가 많으니 무조건 아껴야 했겠지요. 가난했어도 아버지는 자녀 교육을 가장 먼저 생각하셨어요. 8형제 중 5명이 최고 학부까지 졸업했으니까요. 어렸을 때 나를 알던 사람들은 수줍음 타는 소년으로 기억할 겁니다. 친구들과 잘 섞이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종일 독서만 할 때도 있었어요. 책이 유일한 친구였죠. 국어 선생님 조언을 듣고 이 성격이 고쳐졌습니다. 연극반에 들어가라고 하셨거든요. 무대에 서려면 내성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어요. 관객 앞에서 춤추고 큰 소리로 말하려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고집스런 자아와 싸우지 않고는 불가능했죠. 연극은 제 성격을 바꿔주었고 제 자존감을 높여주었습니다. 연극을 하면서 성적도 좋아져서 아비장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때 처음 고향을 떠나게 되었죠.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질문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일 것입니다. 장관님도 그런 근원의 문제를 놓고 고민 하셨나요?

그럼요. 고2 때부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존재 이유, 이 땅에서 나의 소명과 사명, 사후의 삶 등에 대해서요. 철학자 중에 소크라테스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으면서 그가 자신이 믿는 진리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사실을 알았고 그것이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죽음 때문에 사후의 세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지요. 그때 같은 반 여학생이 제게 성경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부터 읽어나갔는데 처음에는 아브라함, 노아, 다윗과 같이 위대한 인물들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크게 놀랐습니다. “여기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뛰어난 분이 계시네!” 바로 예수님이었어요. 부패한 세상에서 변질되지 않는 유일한 분, 예수님을 저는 선택했고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판사가 되었지만, 군사 쿠데타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 기간이 장관님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입니까?

(그는 오른손을 이마에 얹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무언無言의 순간이었지만, 답변을 듣고 있는 듯했다.) 으음… 가장 어두웠던 시절로 두 장면이 떠오릅니다. 처음은 대학생 때입니다. 밥도 잘 먹지 못했으니 버스비 없는 건 자연스런 일상이었죠. 그때는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이 꿈이었어요. 하지만 그 결핍감이 내일을 바라보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망명 시절입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고국을 떠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정신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도 물론 컸습니다. 호구지책을 찾다가 공사장에서 미장공의 조수 일을 했습니다. 제게 가난은 어릴 때부터 가까운 친구였는데 망명지에서 만난 가난은 좀 달랐습니다. 앞날의 희망이 전혀 없으니까요. ‘이 일만 하다가,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면 어쩌지?’

그렇게 벨기에 브뤼쉘에서 암울하게 살면서, 한편으로 사회운동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아프리카 난민 연합의 멤버로서 계속 코트디부아르 군부독재를 규탄하고 여러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다가 NGO를 위해 일하는 법관을 만났고, 그분을 통해 콩고 킨샤사로 갈 기회가 생겼지요. 저는 유엔 직원으로, 불합리한 관행을 척결하는 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인권 관련 범법자들이 콩고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 제 업무였고, 국제형사재판소의 법률 전무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부패 방지 분야의 기초를 그때 다 닦은 것 같습니다.

저는 못 견딜 정도로 삶이 어려울 때 출산의 순간을 상상합니다. 정말 힘들어서 마지막 같은 순간이 왔을 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니까요. 이것은 제가 살면서 항상 경험하는 일입니다. 어떤 일이 너무 어려워 제가 못하겠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고 나면 어려움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외형적으로 힘들긴 하지만 사실 제 내면에는 평화가 깃듭니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 해결된다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 말입니다.

쌀쌀한 날씨에 외부에서 촬영을 했다. 춥지 않은지 물었더니 “이미 더운 나라에서 충분히 열기를 받고 살아서 괜찮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관님 인생의 가장 밝은 때를 찾아본다면 언제일까요?

사실, 가장 밝은 때를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살면서 가난과 힘든 상황들이 계속 되었지만, 그 고통 속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심은 사랑, 이 사랑에 대한 추억들이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도록 저를 이끌어주기도 했습니다. “아, 그건 정말 최고였어. 멋진 기회였어.” “만약에 내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오늘 나는 여기에 없었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것이 제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시골 고향에 있는 농장에서 제가 어떤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심장을 뛰게 할 일은 이런 것입니다. 고향의 농장에서 불우했던 청년들이 바르게 자라나고, 마인드교육을 받아 마음이 변하고 나아가 사회와 문화적 환경도 변해가는 겁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가 완성될 시기가 내 인생의 가장 밝은 때가 아닐까 기대합니다.

교육 문제로 알게 된 박옥수 목사님이 장관님의 멘토라고 들었습니다.

네, 젊은이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은 대단합니다. 그들에게 대가 없는 헌신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영역으로 연결해주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국제청소년연합 소속 단원들이 전 세계를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소식을 계속 듣고 있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최근엔 한국에 오신 모잠비크 영부인이 목사님과 면담을 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자우라 곤살루 페라웅 뉴시Isaura Gonçalo Ferrão Nyusi 영부인은 목사님 일행을 내년 2월에 모잠비크로 초청하셨다는데, 그 소식에 저도 무척 기쁘고 기대가 되었습니다. 코트디부아르가 그 길을 걸어왔듯이, 그 나라에도 마인드교육이 시작되면 국민들이 변할 테니까요. 간혹 깊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제게 그런 분입니다. 제가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항상 그 만남에 있습니다. 

그의 인생엔 모퉁이마다 필연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심한 성격에서 꺼내준 국어 선생님, 철학에서 신앙의 세계로 이끌어준 소크라테스, 그리고 자신의 판결이 옳을 수 없음을 알게 해준 수감자, 정치적 불의에 맞설 신념을 만들어준 부정부패들,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준 아내, 그리고 마음으로 사는 길을 제시해준 멘토….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이들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그의 걸음을 따라 동행하고 있는 수많은 ‘만남’ 덕분에 그는 확신과 공감, 그리고 사랑을 품은 사람으로 살고 있다.

글 조현주 발행인  사진 배효지 기자 

조현주 realantiqu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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