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신영미

지난 11월 18일, 서울 중구 구민회관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연을 듣고 있었다. 강사 신영미 씨는 시작 전에 자신을 ‘독수리 5형제의 엄마’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딸은 엄마의 강연을 돕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고, 남편은 아내의 모습을 담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화목한 가정이었다. 강연 중에 소개된 가족사진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강연 후 만나 질문을 던졌다. “5형제라고 하셨는데 아까 가족사진엔 4명뿐이네요?” 신영미 씨는 “둘째 아들이 9살 되던 해에 하늘나라로 갔어요.”라고 답했다.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묻다가, 그녀의 기막힌 사연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족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 인터뷰를 청했다.

26살의 신영미 씨는 해병대 장교로 임관한 남편과 결혼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을 믿었기에 집안의 반대를 이겨냈다. 그리고 결혼한 이듬해에 생긴 배 속의 아이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의사는 “다운 증후군 같습니다. 큰 병원에서 검사해보셔야 할 겁니다.”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며 “정상입니다.”라는 소리를 기다렸다. ‘이렇게 예쁜 딸이 무슨! 말도 안 돼’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마지막 기대를 안고 찾아간 병원에서 “다운 증후군이 확실합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못 들을 수도 있고, 심장도 좋지 않습니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생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라는 진단을 받았다. 딸이 장애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물밀듯이 생각이 들이닥쳤다. ‘왜 하필 내 딸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 내가 뭘 잘못했지…? 그래, 다 내 잘못이야…. 내 딸이 잘못된 건 다 내 탓이야.’

그 후로 오직 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하며 살았다. 다양한 색을 보여주면 지능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하루에 일곱 번, 무지개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의 24시간은 온통 딸에 맞춰 돌아갔다.

얼마 안 되어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를 보면 모두 “이렇게 예쁜 애는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도 예쁜 아이였다. 그토록 사랑스럽던 아들이 돌이 됐을 무렵 갑자기 발작하며 의식을 잃었다. 급히 찾아간 병원에선 급성 뇌수막염이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렇게 둘째 아들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됐고, 휠체어 생활을 시작했다.

두 아이만으로도 벅찼을 것 같지만, 신영미 씨와 남편은 아이를 더 낳기로 했다.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가족이 많으면 힘이 될 테고,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셋째 딸이 태어나고, 그 뒤 넷째 아들,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일곱 가족이 힘을 합쳐 열심히 살아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남편이 더는 같이 살기 힘들다고 손을 들었다. 신영미 씨는 남편과 별거를 선언하고 홀로 다섯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신영미 씨 옆에는 바리스타를 꿈꾸는 첫째가 서 있고, 아빠 옆엔 사랑스러운 셋째 딸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그 옆에 든든한 장남인 셋째와 귀염둥이 막내가 나란히 자리했다. 이렇게 사이좋은 형제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우애가 깊다.
신영미 씨 옆에는 바리스타를 꿈꾸는 첫째가 서 있고, 아빠 옆엔 사랑스러운 셋째 딸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그 옆에 든든한 장남인 셋째와 귀염둥이 막내가 나란히 자리했다. 이렇게 사이좋은 형제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우애가 깊다.

그 당시의 심정을 상상조차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떠셨는지요?

첫째 딸이 다운 증후군이란 진단을 받은 뒤 제 머릿속엔 ‘내 딸에게 최고로 잘해줄 거야. 가장 좋은 것만, 가장 맛있는 것만, 가장 예쁜 것만 줄 거야’라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제 마음과 다르게 그렇지 못했어요. 딸은 돌도 되기 전에 심실중격결손증이란 병으로 심장 수술을 받았고, 척추 측만이 심해서 척추 전체 교정 수술도 받았어요. 코와 혀에도 문제가 생겨 수술했고요. 그 작은 아이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나면, 전 ‘수술이 잘못되면 어떡하지?’라는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였어요. 수술비도 만만치 않아 그 비용을 감당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가장 힘들었던 건 죄책감이었어요. 그냥 다 나 때문인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최선을 다하면 그런 형편이 조금이나마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힘들다는 말도 하지 못했어요. 남편이 괜찮냐고, 힘들지 않냐고 물어도 한 번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죠…. 아들이 아프고 나서는 더 막막했어요. 무슨 정신으로 그때를 살아냈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지도 않아요. 그냥 날마다 ‘조금만 더 견디자, 조금만 더 힘내자’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견뎠던 것 같아요.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독한 마음으로요.

남편이 별거하자고 했을 때, 앞이 막막하셨을 거 같아요.

남편도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고된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쉴 곳이 없었거든요. 남편이 있었지만, 집 어디에도 남편의 자리는 없었어요. 그것만이면 다행이겠지만, 제 마음에도 남편을 위한 방 한 칸 없었어요. 그저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목매며 살았으니까요. 막내아들이 태어나고 난 후로는 안 그래도 없던 대화가 더더욱 줄어들었어요. 그러다가 한 번씩 문제가 생기면 서로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오해하고, 넘겨짚고,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고요. 그러니 어땠겠어요?

어쩌다 말을 섞으면 날 선 단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어요. 5년 정도를 그렇게 보냈어요.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남편이 이야기하더군요. “제대할 테니, 더 이상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라고요. 싸울 때면 이혼이 심심치 않게 나왔는데, 그땐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 안 돼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어요. 저 혼자서도 아이들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으셨을 텐데요.

혼자 살아보니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졌죠.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헤어지고 나서야 알았어요. 그런데도 할 수 있다며 최선을 다했어요. 악착같이 돈도 벌고, 아이들도 키우면서요. 내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걸 입혀 주고 싶어서 힘들다고 생각하는 시간조차 아끼며 살았어요. 내 삶의 전부인 아이들을 상처받지 않게 키우고 싶다는 마음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서울에 오고 얼마 안 됐을 때, 셋째 딸이 “엄마, 이제 아빠랑 안 싸워?” 하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마랑 아빠랑 싸울 때 우리는 어떤 기분인 줄 알아? 온 산이 흔들리는 것 같았어.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엄마가 없으면 아빠랑 싸우는 일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엄마가 우리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것도 없을 테니까.”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살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든 아이들만큼은 “엄마 최고야. 엄마가 제일 좋아.”라고 말해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제가 그토록 사랑하고 지키고 싶었던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저였어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처음으로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내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사는 건 정말 본받을 만한 일이다. 신영미 씨의 삶이 그랬다. 누구라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단하다고 할 만큼 자식만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신영미 씨는 그날 엄마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자신 때문에 자식들이 상처를 받았다면,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돌아서야 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매듭지은 것이다. 아이들을 남편에게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 역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생각에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곤 오래 전에 다니던 교회를 찾아갔다. 열심히 살 줄만 알았지 삶을 넓고 깊게 볼 줄 몰랐던 신영미 씨는 교회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묻고 배우며 아이들을 양육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엄마의 변화를 알아차리던가요?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알아차리더라고요. 가장 먼저 달라진 점은 저를 부르는 아이들의 말투였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을 강압적으로 대하고 있었나 봐요. 그러니 아이들의 대답 역시 항상 주눅들어 있거나 겁먹은 목소리였는데, 그때부터 “엄마~” 하고 부르는 말투가 부드러워졌어요. 그리고 전에는 제가 아이들을 다 돌보려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 속으로 ‘이런 건 애들이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같이 있어도 뿔뿔이 흩어져 있는 모양새였거든요. 그런데 그때부터 서로서로 챙기는데, 그 모습이 정말 고맙고 예쁘더라고요. 제가 아이들 양육법을 교회에서 배우니까 아이들도 보고 배우더라고요.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점차 안정을 찾았어요. 전에는 하루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때부턴 아이들이 고맙고, 하루하루가 행복하더군요.

남편 분과는 어떻게 화해하셨나요?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지 2년쯤 됐을 때였어요.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스쿨버스 안에서 호흡 곤란이 일어났어요. 바로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이미 숨이 멎은 뒤였어요…. 그날 남편에게 전화해 “태준이가 하늘나라에 갔어.”라고 했어요. 아들 영정 사진 앞에서, 정말 오랜만에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마음속에 담아둔 채 꺼내지 못한 말들 있잖아요. 결혼한 때부터 아이들을 낳고 기 르면서 겪었던 어려움, 상처, 하지 못한 말 등 미뤄둔 이야기를 토해냈어요. 결혼하고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았어요. 남편도 마음고생을 많이 했더라고요. 그렇게 장례를 마치고,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어요. 전, 이혼할 마음으로 털어놨는데 말이죠. 그렇게 다시 합쳤어요. 아빠가 온다니까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던지요.

남편이 제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헤어져 있으면 힘들다고 이야기할 줄 알았다.”라고요. 힘들다는 이야기를 못 하겠으면 양육비라도 달라고 해야 하는데, 전 그런 이야기조차 하지 않으니 진짜 이상했대요.

그 일을 계기로 우리 가족은 자주 모여서 대화를 나눠요. 요즘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인지부터 최근에 받은 상처들을 꺼내놓죠. 애써 감추거나 혼자 눈물 흘리지 않아요. 그렇게 다 내놓으니까 화목해지더라고요. 전에는 감추고, 힘든 건 이야기하지 않는 게 서로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틀렸던 거죠.

가족 품으로 돌아온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이 달라졌음을 느꼈다고 한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했던 가정이 자신과 떨어져 있던 2년 사이에 단단해진 것이다. 넷째 아들은 이제 자신이 장남이라며 누나들과 동생을 챙기고, 셋째 딸은 어느새 자라 엄마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았던 첫째 딸은 누구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사람이 되었고, 막내 역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몫을 척척 해냈다. 남편은 그 변화가 어디에서 왔는지 주목했다. 이전의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었는데, 더는 희생자가 아니라 동등한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 역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한 가장의 모습은 매듭짓고 말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잘 지내고 계신지요?

어느 집이 행복하기만 할까요.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날도 있었고, 어린 시절 아빠 없이 지냈던 날들이 서러웠는지 자식들이 아빠에게 대들기도 했고요. 넷째랑 막내가 너무 친해서 셋째 딸이 외로워하기도 했죠. 그런 날엔 온 가족이 모여 밤새 이야기해요. 울다가, 웃다가, 싸우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하는데, 이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거겠죠? 누구도 입을 닫거나 혼자 삭이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지낸 지 벌써 17년이 됐네요.

시간이 지난 만큼 어렸던 아이들이 이제는 다 컸어요(하하). 최근 우리 집의 가장 큰 뉴스는 큰딸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거예요. 큰딸에겐 미안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 자격증을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냥 취미로만 해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큰딸이 새벽 6시에 일어나 공부하기 시작하더니 시험에 합격하더라고요. 제 딸이지만 너무 자랑스럽고, 불가능하다고 말한 게 부끄러웠어요. 그리고 막내아들은 어느덧 자라서 해병대 학사 장교로 훈련받고 있어요. 아빠처럼 군인이 되겠다면서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온 가족이 모여 이야기하고,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네요. 말 나온 김에 오늘 모여야겠어요.

어려움은 수시로, 갑자기 생기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만나 넘어질 때도 있지만 잘 넘어가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어려움이 찾아올 텐데 그땐 또 어떻게 넘으실지 궁금합니다.

전에 저는 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고 애썼죠. 잘 안 될 때가 많았는데도 그걸 인정하기보다 내가 더 노력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그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할 수 있다는 마음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힘들고 어려울 땐 그걸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럼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결과도 훨씬 좋더라고요. 그래서 전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침표를 찍었어요. 특히 ‘혼자, 나 스스로’라는 말에는 풀리지 않게 매듭을 지었죠.

제 삶에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지금껏 배운 것들을 적용하며 넘어보려 합니다. 그땐 지금보다 인정하는 것도 수월하고, 옆엔 든든한 가족들이 함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어느새 그 어려움이 지나가 있을 것 같네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멋진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생을 매듭지을 필요가 있을까? 신영미 씨는 자신의 희생과 최선을 끝냈다. 그것 때문에 가족이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멋진 매듭이 있다면 이런 매듭일 것이다. 박수 받을 만한 일도 얼마든지 틀렸다고 인정하고 돌아서는 것, 그래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말이다.

취재 최지나 기자 사진 박종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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