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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진작에 말씀을 드렸다면

기사승인 2022.05.13  17: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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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희 잘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우리 걱정 말고 몸조심해서 잘 갔다 오너라.”

“아버님, 반찬은 냉장고 안에 다 뒀으니까 잘 챙겨 드세요.”

“그래, 다녀오너라.”

2007년 9월 초, 우리 부부가 의료봉사팀을 따라 약 일주일간 아프리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집을 나서기 전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려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공원에 간다고 하셨다. 아직 낮에는 햇볕이 따갑고 더위가 가시지 않아, 나와 아내는 차로 공원까지 모셔다드리고 출발하겠다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바람도 쐴 겸 운동을 하시겠다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우리는 공항으로 출발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고 손을 흔들면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힘들고 위험했다. 빌딩 벽을 타고 내려오며 벽면에 페인트를 칠하시거나, 혼자 건물 옥상 땡볕 아래에서 온종일 방수공사를 하시거나, 아니면 공사장에 가셔서 목수 일을 하셨다. 큰 일거리가 없으면 일반 가정집에 가서 보일러를 고치는 일을 하는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다. 난 철이 없고, 생각이 없어서 아버지가 힘든 일을 하시는 것이 싫었고, 페인트나 시멘트가 묻어 있는 아버지의 옷도 싫었다. 아버지가 측은해서가 아니라 “왜 우리 집은 항상 이렇게 어려운 걸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특히 술을 드시는 날은 우리 가족 모두가 괴로웠고, 잠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자상하시다가도 술만 드시면 지난날에 쌓인 한과 분을 참지 못하셨고, 그 맺힌 응어리는 우리가 어떻게 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항상 아버지와 거리를 두었고, 심할 때는 아버지와 떨어져 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셨고, 아버지에 대한 내 마음도 바뀌어 갔다. 우리 부부는 결혼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있는 어머니 간병을 도맡으셨고, 아내는 집에서 부모님과 첫아이를 돌보며 부지런히 살림을 꾸려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감사했지만, 그 마음을 전해드리지는 않았다.

케냐에서 나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가나를 거쳐 토고에 도착한 날이었다. 우리 집 바로 앞집에 사시는 분이 내게 급하게 전화를 하셨다. 119 구급차로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 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몸이 불편하고 아프신 분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아무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왜 아버지가 병원으로 실려 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급성 패혈증이었다. 여행에 동행하던 의사들은 패혈증이 약만 잘 들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다시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약이 듣지 않아 아버지가 위독하시다고 했다. 우리는 비행기표도 없이 가나 아크라 공항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항공사 데스크에 가족이 위독한 상태니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아무 표라도 달라고 사정을 했다.

항공사에서는 한국 연결 편까지는 없고, 두바이를 거쳐 방콕까지 가는 노선밖에 없는데, 그것도 취소되는 표가 나와야 가능하다고 했다. 한참 후 티켓 한 장을 구했고, 또 잠시 후에 한 장을 더 구해 아내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만석인 상태에서 취소된 표를 구한 것이기에 나와 아내의 좌석은 떨어져 있었다. 옆 좌석의 승객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자리를 바꿔주지 않았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두바이를 거쳐 방콕에 도착할 때까지 지난날 내 곁에 있어 주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술을 드시면 나를 끌어안고 따갑도록 볼을 비비며 웃으시던 모습, 운동회 때 학교에 오셔서 같이 사진을 찍던 모습, 새벽에 나가서 하루 내내 힘들게 일하신 후 연장통을 손에 들고 집에 오셔서 어깨를 주물러 달라던 모습, 이놈(나를 말함)이 한번 일을 낼 거라며 기대하시던 모습, 고등학교 시절에 가출했다가 돌아와서 인사를 드렸을 때 등을 돌리고 우시던 모습, 나중에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또 우시던 모습, 손자가 마냥 좋아서 새벽에 아이를 깨워서 자전거에 태워 공원으로 가시는 모습.

이런 것들 모두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던 모습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모습을 제대로 못 보고 산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아버지께 너무 죄송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내가 비행기에서 기도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달라고 안 할 테니까, 제가 아버지 손만이라도 잡게 해주세요.”, “제가 아버지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시간만 주세요.” 아니면, 내가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생명을 붙들어 달라고 했다. 나에게 다른 욕심은 없었다. 뒤늦게나마 깨달은 아버지의 사랑에 인사를 드리고 싶을 뿐이었다. 생이 끝나가는 아버지께 내가 손을 잡아드린들,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린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편에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슬픔과 죄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방콕에 도착해 한국행 표를 구하지 못해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아버지 입원 소식을 듣고 급하게 서울로 올라온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있더니 누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문택아, 방금 아버지 돌아가셨다.”

아버지 손 한번 잡아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결국 나는 그걸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두를 사랑했던 분이셨다. 누구보다 사랑이 가득했지만, 나는 그 사랑을 몰랐다. 또 그런 걸 말로 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진작에 사랑한다고, 그리고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다면 너무 좋았을 건데, 어린 날, 젊은 날 나는 그렇게 어리석었다.

 글 박문택 변호사 

박문택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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