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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지으며, 고마운 얼굴을 떠올립니다

기사승인 2022.08.08  15: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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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농부 이지명

인터뷰를 약속한 청년 농부 이지명 씨가 토마토 농장 사진을 보내왔다. 잘 익은 과실 하나에는 농부의 땀과 애정이 담긴다. 뙤약볕을 견디고, 새벽이슬 맞으며 과실을 살피는 농부의 한 시절이 담긴다. 사진 속 잘 익은 토마토가 청년이 보내온 그 시절을 말하는 듯했다.

“모든 농사가 그렇듯, 토마토 농사를 짓기 위해선 농부가 무척 섬세한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토마토 모종을 심는 것부터, 잘 키워내 수확하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서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보살펴야 하죠. 토마토를 보면 볼수록 사람도 그와 같다고 생각해요. 홀로 자라나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보살핌과 인내, 따듯한 마음들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이지명 씨는 지난 1년 6개월간 토마토 농장에서 농부로 수고하며 지난날 방황하던 자신을 이끌어준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농사 짓는 청년의 인생 이야기가 궁금해, 그가 일을 마치는 저녁 시간까지 기다렸다.

이지명
전라남도 나주에서 토마토 농사 짓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잠시 대전으로 떠나 대학을 다녔지만, 졸업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학 시절 아프리카로 떠났던 해외 봉사 프로그램에서 타인과 교류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던 그는 지금 토마토 농사를 지으며, 아버지의 삶과 자연의 섭리를 느끼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매일 늦게 퇴근하나요?

네, 대부분이요. 일이 많아서 작년부터 늘 이때쯤 집에 돌아왔어요. 제 일과는 항상 일정해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정오까지 일하고, 빛이 뜨거운 오후에는 점심 먹고 두세 시간 정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을 시작해요. 빠르면 여덟 시, 늦으면 아홉 시에 일을 마칩니다. 저희 농장은 1년에 토마토 농사를 크게 두 번 짓습니다. 1월에 농사를 시작해서 4~5월에 한 번 수확하고, 또 8월 중순에 시작해서 10~11월에 수확하죠. 그래서 7월인 지금은, 사실 좀 한가한 시기인데요. 올해엔 토마토 외에 새로운 작물 재배에도 도전하느라 정신이 없네요.(웃음) 게다가 온실 하우스도 새로 짓고 있어서 더 바쁜 것 같아요.

지칠 만도 한데 표정은 무척 밝아 보여요.

그런가요?(웃음) 농사일을 하다 보면 몸은 고되지만, ‘내가 정말 살아있구나.’라는 생동감을 느껴요. 사실 어릴 적에는 농사 지으며 옷에 흙을 묻히고 땀 흘리는 것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농사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열심히 일한 만큼 소출을 얻을 때의 그 뿌듯함이 커요. 잔꾀를 부릴 수 없는 정직한 일이죠. 또, 농사는 전체적인 과정을 넓게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론 작은 일도 깊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저는 덤벙대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에요.(하하) 하지만 토마토를 기르며 치밀하게 때론 진지하게 사고하는 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버지 가업을 이어 농부가 될 결심을 한 건 언제였나요?

재작년 겨울부터이었어요. 제 고향이자, 농장이 있는 곳이 전라남도 나주시인데요. 고등학교 졸업 후 대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어요. 사실 4년 대학생 시절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인간관계에 실패해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제 진로도 미궁 속에 빠져있더라고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어요. 결국, 몸과 마음이 지쳐 고향에 돌아왔고요. 처음엔 집에서 시험 준비를 하며 가끔 아버지 일을 조금씩 도울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일하면서 몰랐던 농사의 매력을 느끼면서 ‘이 일 해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후 바로 부모님께 말씀드렸나요?

아니요. 처음에는 ‘충동적인 결정은 아닐까?’ 걱정이 컸어요. 그때까지 모든 일을 혼자 고민하며 결정했는데, 결과가 늘 신통치 않았어요. 농사일을 한다면,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저희 부자父子를 잘 아는 목사님을 찾아갔어요.

목사님은 고향에 온 저를 반겨주시며 제 고민을 들어주셨어요. 그리곤 웃으며 한마디 하셨죠. “좋다. 하나님은 누구든 돕기를 원해. 하지만 이를 느끼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 지금부터는 무엇을 하든 홀로 살지 말고, 너를 향한 따듯한 마음을 느끼면서, 감사하게 또 힘차게 살기 바란다.” 그걸 기억하는 게 행복한 삶의 진짜 비결이라는

말과 함께요. 그 한마디가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동시에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어요. 대학 시절 제가 들었던 이야기와 무척 비슷했거든요. 순간, 먼 나라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죠.

그 이후에, 제 생각을 정리해 부모님께 가업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다행히 기뻐하시며 제 결정을 허락해주셨습니다. ‘농사’라는 새로운 분야의 일에 뛰어들었던 건, 내면적인 변화의 시작점이기도 했어요.

1. 토마토가 푸른빛을 띠는 4월, 출하 직전까지 과육 상태를 세심하게 살핀다. 2,3. 일주일 중 이틀은 전남 스마트팜 혁신밸리에서 진행하는 청년농업인 교육을 받는다. 실습 수업을 받는 실제 농장과 그곳에서 길렀던 모종들.

대학 시절에 했던 고민과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가요.

지금도 그때도 제 생각의 방향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생각이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이걸로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되었지?’ 등으로 달려갈 때가 많아요. 살면서 ‘더 갖춰야 나를 지킬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요. 대학 시절에는 더 심했어요. 한번은 강한 마인드를 갖춘 사람이 되고 싶어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봉사를 떠난 적이 있었어요. 꼬박 1년간 활동해야 했는데, 저는 두 달 만에 한계가 찾아왔어요. 저의 바람과 달리 그곳에서 본 제 모습은 게으르고, 희생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거든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제 모습에 크게 실망했고, 그 생각에만 빠져 사느라 함께 살았던 지부장님, 동료 단원들, 현지인들이 전혀 반갑지 않았어요. 보츠와나에 지내는 시간이 점점 괴로웠죠. 결국, 한국에 돌아오려 했어요. 그때 지부장님이 저를 잡아주셨어요.

제게 해주셨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사람은 다 각자 모나고 약한 부분이 있어. 때론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것들도 있지. 그런데 그 때문에 슬프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야. 못난 모습이지만 너를 품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감사, 사랑을 느끼며 살 수도 있어. 진짜 강한 사람은 사랑과 연결되어서, 언제 넘어져도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날, 가장 놀랐던 건 ‘삶을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구나.’였어요(웃음). 저는 사람을 믿지 못해서, 혼자 고민하며 살았는데 그곳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묻고, 듣고, 또 제 속 마음을 꺼내놓으면서 사는 게 무엇인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만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배웠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후, 어느 순간부터 그 배움 대로 살기보단, ‘무엇인가 안다.’라는 것에 우쭐해 사람들을 대했던 것 같아요.(웃음) 해외 봉사를 통해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 그 방향을 인지했다면, 농사를 시작하면서는 그걸 제 삶에 제대로 적용해보는 과정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요.

1. 토마토 농사법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도 배우는 가장 가까운 스승이 바로 아버지이다. 2. 보츠와나에서 태권도 아카데미를 진행했다.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과 만났을 때, 아카데미 시간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함께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그 변화를 느끼며 살고 있는지요.

제가 지금까지 농사일을 즐겁게 하는 걸 보면, 분명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하하) 한동안 고립되었던 제 세계에 주변 사람들의 푸근한 마음 그리고 좋은 이야기들이 흘러들어오고 있어요. 그러면서 가장 먼저 달라진 건 부쩍 가까워진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함께 일을 하면서, 지난 세월을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는지 알아가고 있어요.

아버지는 훌륭한 기술을 많이 가지고 계시는 장인이세요. 그런데 늘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세요. 그러곤 농사가 잘되는 날에도, 잘 안 되는 날에도 눈이 와도 비가 와도 한결같이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십니다.

아, 그리고 올해 첫 작기에 농장에 급작스레 병이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시장에 출하하려면 토마토가 더 자라야 하는데, 바이러스가 하우스 전체에 퍼진 거예요. 한 작기 농사에 실패하면, 손해 금액이 무척 크기 때문에 걱정이 컸어요. 그때 아버지가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모든 일이 그냥 생기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삶에 필요하기에 있는 일이라 여긴다. 아들아, 모든 어려움이 어려움으로만 끝나지 않아.” 망연자실했던 저와 달리,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길을 찾으셨어요. 결국 작은 크기의 토마토지만, 좋은 판매처를 만나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어요. 오히려 이익이 남아, 최근에 제가 책임지고 가꿔나갈 하우스를 새로 짓게 되었죠. 농사지으며 하루하루 아버지의 마음을, 주변 농부분들의 마음을, 자연의 섭리를 하나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훗날, 지명 씨도 아버지를 닮은 혹은 아버지를 뛰어넘은 멋진 농부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지요?

얼마 전, 지인의 소개로 참외 농사 짓는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도 뒤늦은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참외 농사를 배웠는데 이 분야의 전문가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무수한 연구 끝에 성주 참외 농가 1위를 하셨어요. 그런데 1위라는 순위가 주는 만족감은 잠시였고 허무함이 찾아왔대요. 그리고 그때부터 참외 농사 때문에 삶에 여러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무료 상담을 해오셨다더군요. 그분에게 삶에 가장 중요한 보화란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사실, 저도 1년 농사가 잘됐을 때 무척 즐겁긴 했지만 한편 ‘이게 다일까? 일이 잘되는 게 행복일까?’ 하며 알 수 없는 갈증을 느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 질문의 답을 찾은 것 같았어요. 물론, 저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 초보 농부이지만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그분처럼 누군가에게 따듯한 마음을 전하고 또 받으며 살아가고 싶어요.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놀라워요. 아무것도 없이 고향에 내려왔는데 어느 순간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꿈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최근에는 스마트 팜 농법을 배우느라 원 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어요. 지금까지 저를 품어주시고, 때론 혼을 내기도 하며, 함께 응원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토마토 농사짓는 농부의 일은 철마다 조금씩 다르다. 토마토 모종이 어릴 때 지주대를 세워주고,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손을 써놓고, 꽃이 핀 후에는 열매가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잎과 곁가지를 친다. 작은 묘목 단계에서 맺힌 첫 열매는 일부러 따줘야 한다.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토마토가 잘 자라기 위한 과정이다. 지명 씨의 설명을 들으니, 우리 인생도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만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면,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모두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모퉁이마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이끌어주던 선생님들이 자리하고 있었단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그 감사한 마음을 토마토에 담고 있었다.

고은비 기자 press49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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