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각의 아버지, 오귀스트 로댕

오귀스트 로댕의 생존 시 모습이다. 사진 위키미디 어 커먼즈
오귀스트 로댕의 생존 시 모습이다. 사진 위키미디 어 커먼즈

1904년 프랑스 파리.

한 조각가의 작업실에 파리시청의 직원이 찾아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오?”

“장식미술관 건립계획이 무산되었습니다. 조각 주문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음… 괜찮소. 상관없소.”

“네에?”

“마감 시한이 없어서 오히려 좋군.”

“저어… 계획이 무산되어 저희는 돈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상관없다 하지 않소. 난 계속 이 작품을 할 것이오.”

프랑스 정부는 1880년, 장식미술관 신축을 위해 미술관 정문을 장식할 조각을 만들어달라고 한 조각가에게 작업을 의뢰한다. 그로부터 24년 후, 미술관 건립계획이 무산되었고, 정부는 조각 주문을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렸다. 그럼에도 이 대단한 긍정 마인드와 끈질긴 집념을 가진 조각가는 작업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가 사망한 1917년까지, 작품 제작에 걸린 시간은 무려 37여 년. 바로 근대 조각의 아버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의 실화다. 그렇게 탄생한 조형물 ‘지옥의 문’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상 중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의 원조가 되는 작품이다.

1904년 파리시청 직원의 말에 로댕이 작업을 포기해 버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지옥의 문’을 마주하기 힘들었으리라. 절망의 소리에도 긍정의 힘으로 맞서며, 집념 어린 예술혼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낸 로댕.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자.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 1863~1864년, 브론즈,31×19×16㎝,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소장. 사진 필라 델피아미술관 홈페이지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 1863~1864년, 브론즈,31×19×16㎝,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소장. 사진 필라 델피아미술관 홈페이지

1840년 프랑스 파리의 가난한 하급 관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로댕은 10살 때부터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고, 14살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들어가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는다. 17살에 국립미술전문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응시하지만 3년 연속 번번이 낙방을 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공 조형물, 건물 장식 등을 만드는 조각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1862년 누이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지만,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본 수도원장의 설득에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온다. 1864년 24살의 로댕은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를 살롱에 첫 출품하면서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로 들어선다.

작품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는 보기에도 심상치 않다. 이 조각상은 살롱의 출품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데 그 이유는 바로 “너무 생생하고 지독하게 사실적이라 거부감이 든다.”는 것.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는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작업실을 청소해 주던 할아버지를 작품의 모델로 삼았는데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경에 난방시설이 없어 작업장은 굉장히 추웠고, 습도와 온도도 맞지 않아서 만든 작품이 일그러졌다고. 오히려 로댕은 일그러진 조각상을 보며 청소부의 고단하지만 진정한 삶이 더 잘 표현된 것 같다고 좋아했다고 한다. 대상의 형태만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삶과 정신에 주목한 것이다. 당시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 평가받던 작품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사실적 표현을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재평가를 받고 있다.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지옥의 문’은 로댕의 예술성을 집대성한 역작으로, 가로 4m, 세로 6.35m, 깊이 1m, 무게 7톤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작품이다. 평소 중세의 서정시인 단테의 서사시 《신곡》을 즐겨 읽던 로댕은 《신곡》의 〈지옥편〉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또한 르네상스의 거장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산 조바니 세례당에 청동으로 ‘천국의 문’을 만든 것을 참조함.) 단테의 〈지옥편〉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을 방문해, 처절한 형벌을 받는 사람들을 목격한다는 상상의 내용으로 로댕은 거기서 묘사된 장면을 조각으로 옮겨 와 ‘지옥의 문’을 주조해낸다.

‘지옥의 문’, 1880~1917년, 브론즈, 400×635×94㎝,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소장. 사진 위키아트
‘지옥의 문’, 1880~1917년, 브론즈, 400×635×94㎝,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소장. 사진 위키아트

작품을 보면, 190여 개의 크고 작은 인물 조각들이 서로 얽혀 고통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절규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꼭대기 중앙에 선 인물상 ‘세 망령’이다. 세 악령은 머리를 맞대고 집게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는데, 그 손을 따라 내려가 보면 지옥의 온갖 장면들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세 망령’ 바로 밑에 로댕은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해 넣는다. 지옥의 문 높은 곳에 걸터앉은 이 조각상은 벌거벗은 채 오른손을 턱에 괴고 고통받는 인간들을 근심스럽게 내려다본다.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내려다보는 시인 단테를 형상화했다는 해석, 로댕 자신의 모습 혹은 죄악과 이에 따른 온갖 고통을 목격하고 있는 인간 자체라는 여러 해석이 있다. ‘지옥의 문’은 이외에도 ‘추락하는 사람’, ‘입맞춤’, ‘웅크린 여인’ 등의 다양한 인물상들이 조각되어 있는 역작이다.

로댕은 1880년 ‘지옥의 문’을 제작할 결심을 하고, 단테의 《신곡》을 읽고 또 읽으며 데생에만 1년의 시간을 소요했다. 하지만 표현된 인물들이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 그는 단테의 작품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조각에 담아내려고 했다. 1884년에 전체적인 형태가 완성되었지만 그는 계속 수정을 가했다. 인물 사이에 또 다른 인물을 끼워놓고, 서로의 위치를 바꿔보고, 일부를 부수어 다시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등, 죽기 직전까지도 수정에 또 수정을 거듭했다. 자신의 삶을 깎듯 37여 년을 ‘지옥의 문’ 작업에 몰두하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석고로 제작된 이 원본 조각상은 현재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댕의 사후 10년이 되던 1926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프랑스 정부에 청동 ‘지옥의 문’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한다. 연이어 ‘지옥의 문’이 주조되고, 전 세계에 8개의 청동 ‘지옥의 문’이 탄생했다. 그중 7번째 작품을 삼성문화재단이 구입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된 바 있다. 어떻게 진품이 8개나 존재할 수 있을까? 로댕은 죽기 전, 자신의 전 재산과 팔리지 않은 작품뿐 아니라 작품을 복제할 권리를 정부에게 부여했다. 그래서 프랑스 법에 의해 기관이 주문할 경우 8개로 제한하여 청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하나의 틀이 있으면 여러 개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판화기법처럼 청동 작품 역시 원본 하나를 가지고 다수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한편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조각상으로, 로댕이 ‘지옥의 문’에서 ‘생각하는 사람’을 별도로 독립시켜 186㎝로 더 크게 제작해 1888년 살롱에 출품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로댕의 대표작이자 대중적인 높은 인지도를 보이며 다양한 패러디의 대상으로도 유명세를 떨치는 작품이다. 이것 역시 여러 버전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 곳곳의 박물관이나 공공장소 등에 전시되어 있다. 본래의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생각하는 행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는 기념비적인 조각상으로 자리잡는다.

‘생각하는 사람’, 1880~1882년, 브론즈, 68.6×89.4×50.8㎝, 파리 로댕미술관.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생각하는 사람’, 1880~1882년, 브론즈, 68.6×89.4×50.8㎝, 파리 로댕미술관.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작품을 살펴보자. 한 남성이 턱을 오른팔에 괸 채 상념과 고뇌에 깊이 빠져 있다. 거칠게 표현된 그의 근육은 고도의 사색에 집중하느라 잔뜩 긴장되어 있다. 팔을 교차하여 비튼 자세와 상체가 숙여져서 생긴 검은 그림자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더하며, 음영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에는 지극히 진지한 면모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인 릴케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모든 힘을 쏟아 사유하고 있다. 온몸이 머리가 됐고, 혈관에 흐르는 모든 피는 뇌가 됐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없이 앉아 깊이 사유하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낸 이 남성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능력과 웅장한 면모를 지닌 영웅이었다면 이렇게 움츠리고 앉아서 심각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으리라.

로댕은 영웅이 아닌 불완전하고 투박한 인간의 모습에 주목한다. 삶에 대한 성찰, 인간 존재의 복잡성, 결정의 어려움 등을 그대로 표현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아카데미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사실적 표현에 감정과 상황에 따른 자신만의 해석을 더하여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로댕의 평범한 인간에 대한 묘사, 사실적 재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고민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칼레의 시민’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당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 군대에게 포위된 프랑스의 칼레 시민들. 당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 중 6명이 나와 대표로 죽는다면 다른 시민들은 살려준다고 엄포했는데, 이에 6명의 시민 대표가 자진해 자기 목에 밧줄을 걸었고 시민들은 울면서 이들을 뒤따랐다고 한다.

‘칼레의 시민’, 1884~1895년, 브론즈, 201×205×196㎝, 파리 로댕미술관.사진 위키아트
‘칼레의 시민’, 1884~1895년, 브론즈, 201×205×196㎝, 파리 로댕미술관.사진 위키아트

이 일화에 영감을 받은 로댕이 만든 기념상이 바로 작품 ‘칼레의 시민’이다. 그러나 조각상을 본 칼레의 시민들은 분노한다. 사람들은 6명의 시민 대표가 성스럽고 위풍당당한 영웅처럼 서 있기를 기대했지만, 로댕은 이들을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한 것이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먼 산을 보는 사람, 고뇌에 잠겨 머리를 움켜쥔 사람, 고개를 숙인 채 긴장과 불안을 견뎌야 하는 사람…. 로댕은 오히려 불완전한 이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용기를 내고, 서로를 격려하며 그렇게 죽음과 마주한 점에 주목했다. 결코 나약하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생명력을 말이다. 그러나 영웅, 초인적 면모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원래 설치될 칼레 시청 광장에서 밀려나 한적한 바닷가에 세워지게 된다.

조각 분야에서 미켈란젤로 이후의 최대의 거장으로 불리는 오귀스트 로댕. 그는 르네상스 대표작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각적인 완전함, 매끈한 표면, 이상적인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 거칠고 투박한 질감 처리,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응시를 통해 조각의 새 시대를 열고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했다. 외형만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심연까지 들여다보려는 시도, 삶과 정신까지 나타내려는 노력, 성찰과 사색으로 진실에 닿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미술학도뿐만 아니라 일반 우리의 삶에도 큰 귀감이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로댕에게 가장 크게 배우는 점은, 포기를 모르는 집념, 돈, 지위, 명예보다 작품 자체를 향한 지극한 사랑, 수천 번 수정을 거듭하면서도 지칠 줄 몰랐던 생명력, 절망의 소리에도 꺼지지 않는 긍정의 힘이다. 바로 37여 년 간 한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던 발판이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작품 세계를 놓지 않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근거이다. 작품에 임하는 로댕의 정신과 태도를 보며 2024년에 우리 역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져 보길. 절망에도 끝끝내 자신의 꿈을 저버리지 않는 것, 매일 최선을 다하며 온몸으로 삶을 살아내는 자세를 말이다. 우리는 오늘도 로댕에게서 예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운다.

글쓴이 정유진

충북대학교 미술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 발표를 해왔으며, 길가온 갤러리에서 갤러리스트로 활동했다. 행복한미술심리센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했고, 현재 파랑새 인성교육원 대표로서 미술교육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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