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국민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1억 850만 달러!

상상 이상의 가격이 매겨졌다. 바로 지난 2023년 6월 27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오스트리아의 국민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애 마지막 작품, ‘부채를 든 여인’이 무려 1억 850만 달러, 한화로 약 1,408억 원에 낙찰된 것이다. 이는 유럽에서 경매된 예술 작품 중 최고 판매가이자 클림트 작품 중에서도 경매 최고가로 기록되었다.

‘부채를 든 여인’, 1917~1918,  캔버스에 오일, 100x100cm,  개인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부채를 든 여인’, 1917~1918,  캔버스에 오일, 100x100cm,  개인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부채를 든 여인’을 보면, 금빛 바탕에 수 놓인 동양풍의 봉황, 학, 연꽃 문양 그리고 복잡한 무늬가 돋보이는 기모노 차림으로 화려한 부채를 손에 쥔 여성, 어깨선을 드러낸 그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눈에 띈다. 클림트의 흔하지 않은 개인 소유 초상화 중 하나로, 1918년 그가 작고한 후 작업실 이젤 위에서 발견된 작품이라는 특별함이 부여된 그림이다. 클림트 특유의 화려함, 장식성, 금빛 등 풍부한 표현력이 가득한 스타일에 동아시아의 정신세계를 더한 실험적인 시도가 엿보인다. 소더비는 “기술적으로 역작일 뿐 아니라 경계를 확장하려는 실험적인 시도가 가득하다”, “절제미에 대한 진정한 찬가”라고 이를 평가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예술 작품은 무엇일까? 김환기(1913~1974) 화백의 ‘우주’이다. 이 그림은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되어 현재 우리나라 최고가의 작품으로 등극해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예술품은?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작품 ‘살바도르 문디’로, 201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 5천만 달러(한화로 약 5,894억 원)에 낙찰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물론 경매 낙찰가가 작품의 절대가격은 아니며, 예술적 가치를 매기는 명확한 측정값이자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해도 전문가와 대중을 매료시키는 예술품의 매력과 가치, 당시 세태를 관통하는 유행과 관심이 경매 가격에 반영된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한 마디로 작품의 ‘인기’가 경매가로 이어지기 쉽다. 이번 호에서는 가장 최근 미술경매의 핫이슈가 되었던 또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자주 거론되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작품 세계를 통해 그림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의 모습.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 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보헤미아 출신의 금 세공사이며 판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상화와 누드, 장식적 패턴과 금색을 사용한 화가로 유명하다.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의 모습.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 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보헤미아 출신의 금 세공사이며 판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상화와 누드, 장식적 패턴과 금색을 사용한 화가로 유명하다.

뛰어난 디테일로 스타덤에 올라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진 클림트의 그림은 경매라는 제한된 영역뿐 아니라 텔레비전 광고, 패러디 굿즈 상품, 아트 포스터, 패션 등 다양한 대중매체와 산업을 통해 광범위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독보적인 화풍으로 예술가와 미술학도에게는 풍부한 영감을, 일반 대중에게는 화려하고 독특한 느낌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오늘날에도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갖는 클림트의 큰 ‘인기’는 ‘부채를 든 여인’에서 얼핏 보았던 것처럼 금빛, 장식성, 화려함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작에서는 화려하고 상징적이며 실험적인 면모보다는 사실주의적인 화풍이 두드러진다.

‘구 부르크 극장 관람 석’, 1888~1889, 종이에 구 아슈, 82x92cm, 빈 시립박 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구 부르크 극장 관람 석’, 1888~1889, 종이에 구 아슈, 82x92cm, 빈 시립박 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작품 ‘구 부르크 극장 관람석’은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아카데미 회화를 보여주는 클림트의 초기 그림이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가 백 년이 넘도록 유럽의 일류 극장으로 존재해 왔던 부르크 극장을 허물고 그곳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클림트에게 사실화 제작을 의뢰했다. 그림 속 관객들의 얼굴표정, 옷차림, 극장 내부 장식 등 사진처럼 정교한 디테일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심지어 다수가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극장과 흥망성쇠를 함께했던 인물들이 중간중간 그려져 있는데 빈 시장,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도 그 안에 있다고. 당시 귀족들에게는 이 작품에 등장인물로 그려진 것은 크나큰 명예였다고 한다. 클림트는 대번에 스타덤에 올라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의 사실주의 화풍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황금빛 장식성에 매료되다

그의 나이 30세인 1892년, 갑자기 아버지가 뇌출혈로, 함께 공방을 차려 활동했던 동료 화가이자 친동생인 에른스트 클림트가 독감으로 같은 해에 사망하면서 클림트는 큰 충격과 상실감에 빠진다. 죽음의 목격, 심리학자 프로이트 이론의 수용,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의 영향으로 점차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보수적인 면모에 반발하기 시작, 1897년 분리파(제체시온)을 결성한다. 반아카데미운동을 벌여 새로운 변화를 이끌며 여러 논란 작을 내놓고 곧이어 분리파에서도 탈퇴,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 개발에 더욱 몰입한다.

이 시기를 전후로 클림트가 주목한 것은 ‘금빛 찬란한 장식성’이다. 그의 개성과 정체성을 발현하는 데 ‘황금’과 화려한 문양을 선택한 것. 재료와 기술의 혁신적인 사용이었다. 사실 ‘금’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친숙했던 대상인 것이 금세공업자인 아버지의 작업을 지켜봐 왔기 때문. 또한 궁핍한 가정환경이었지만 그 재능을 알아본 친척의 도움으로 14살의 나이에 입학한 비엔나 응용미술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 금속 세공법, 이집트 미술 등 장식기법을 익혀 왔었던 덕분으로 금을 다루는 것, 장식은 그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했다.

클림트의 작품세계에 큰 전환점을 준, 이탈리아 라벤 나에 위치한 산 비탈레 성당 내부 모습 중 일부.
클림트의 작품세계에 큰 전환점을 준, 이탈리아 라벤 나에 위치한 산 비탈레 성당 내부 모습 중 일부.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빈을 거의 떠나 본 적이 없는 그가 유일하게 다녀온 이탈리아 라벤나와 베네치아에서 황금 금박의 장식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모자이크의 수도’라는 별칭이 붙은 라벤나에서 클림트는 산 비탈레 성당의 내부를 장식한 모자이크에 주목하고 동로마제국이 낳은 찬란한 빛과 뛰어난 모자이크 양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평면구성, 금칠, 섬세한 모자이크, 화려한 문양 등을 응용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킨다. 실제 황금을 얇게 눌러서 만든 ‘금박’을 유화와 함께 사용하여, 황금으로 작품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 이른바 클림트의 ‘황금시대’(1902~1911)를 열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이 쏟아진다. 특히 금빛의 향연을 여성에게 펼친다. 상류계급의 귀부인에서 요부, 청순한 시골 소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황금빛 찬란함과 화려한 장식을 입고 캔버스 위에서 재현되어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과 ‘키스’와 같은 불후의 명작이 나오게 된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 상 1’, 1907, 캔버스에 오일 과 금박, 140x140cm, 뉴욕 노이에갤러리 소장. 사진 위 키피디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 상 1’, 1907, 캔버스에 오일 과 금박, 140x140cm, 뉴욕 노이에갤러리 소장. 사진 위 키피디아

실제 금을 사용해서 작품을 완성

먼저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작품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은 ‘황금색을 사랑한 화가’라는 그의 별명이 납득이 될 만큼, 화폭에 금빛이 가득한 초상화이다. 그의 단일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의 금을 사용했다. 여성의 몸은 양감이 거의 없는 평면적인 표현이 특징이며, 각종 정교한 문양과 황금빛 화려한 색채가 압도적이다. 그림 속 여인은 오스트리아 유대인 갑부 페르디난트 블로흐 바우어의 부인으로, 페르디난트는 아내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를 클림트에게 주문했다. 어릴 적 오른손을 크게 다친 아델레의 면모를 파악한 클림트는 여리면서도 섬세한 얼굴과 우아함, 자존심이 엿보이는 표정 그리고 손의 처리에 세심한 신경을 써서 작품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유대인이 소유한 값비싼 그림이라는 이유로 독일 나치에게 빼앗겼고 다시 오스트리아 정부로 돌아가지만 나치를 피해 미국에 건너가 살고 있던 아델레의 후손, 마리아 알트만이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그림을 되찾는 실화가 영화 ‘우먼 인 골드’(2015년)에 재현된 바 있다. 알트만은 이 초상화를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길 원하는 조건을 걸어 그림을 판매했고, 유명한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의 둘째 아들 로널드 로더가 그 당시 거래 사상 최고가인 1억 3천 500만 달러(한화로 약 1,416억 원)에 사들여 더 유명세를 얻은 작품이다.

삶과 죽음의 교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키스신 중 하나로 불리는 작품 ‘키스’는 클림트의 회화 중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그림이 아닐까 한다. 황금을 통해 사랑의 찬란함을 표현했다. 사랑의 가치는 아름답고 고결한 황금과 같고, 사랑의 순간은 화려하고 눈부신 시간이다. 하지만 너무 귀해서 잃고 싶지 않은 황금처럼, 사랑에는 너무 소중해서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과 절망이 깃들기도 한다. 남녀는 꽃밭에 서서 서로를 껴안고 있지만 여성의 발끝은 낭떠러지에 겨우 걸쳐져 있다. 사랑이란 아름답고 찬란하나 아슬아슬한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클림트의 고민이 보이는 역작이다. ‘키스’가 공개되자마자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은 직접 그림을 구입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긴 나머지 한 번도 외부로 이동시킨 적이 없다고.

‘키스’, 1907~1908, 캔버스에 오일과 금, 180x180cm, 빈 벨베데레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키스’, 1907~1908, 캔버스에 오일과 금, 180x180cm, 빈 벨베데레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클림트의 ‘황금시대’의 후반부에 나온 작품 ‘키스’에서 엿보이는 두 개의 감정, 두 세계의 교차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도 해석될 수 있는 부분으로, 이는 그의 말년인 1915년작, ‘죽음과 삶’에서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그림 속 좌측에 해골의 얼굴을 한 죽음의 상징이 곤봉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들고, 우측의 사람들, 삶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해골은 인간을 비웃는 것 같기도, 노려보는 듯도 하다. 아름다운 꽃과 장식에 둘러싸인 사람의 무리는 갓난아기부터 시작해 다양한 세대가 서로 얽혀 사랑을 나누며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양극의 극단적인 대비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삶, 죽음이 흉기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 한편으로 죽음을 필연적인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여유로운 수용성 등,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는 클림트가 놓인 실제 삶의 궤적을 따른다. 이 작품을 그릴 즈음, 1차세계 대전, 8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 헬리 혜성의 출현 등, 유럽에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고 클림트는 생생한 죽음의 실체와 조우한다. 물론 그의 무의식에는 아버지와 남동생의 급사로 인해 생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상실감이 이미 들어 있는 터. 그리고 클림트는 1918년에 아버지 죽음의 원인이었던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고, 스페인 독감이 겹쳐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죽음과 삶’, 1915, 캔버스에 오일, 180x200cm, 빈 레오폴트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죽음과 삶’, 1915, 캔버스에 오일, 180x200cm, 빈 레오폴트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나를 알고 싶으면 나의 그림을 보라

황금빛 찬란함으로 화폭을 물들이던 화가 클림트. 삶과 죽음의 교차라는 심오한 세계까지도 놓치지 않았던 그의 작품 세계는 휘황찬란한 색채와 화려한 문양, 매혹적인 상징, 뛰어난 절제미로 시대와 세대를 아울러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하지만 클림트의 작품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그는 인터뷰를 거부하기로 유명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떤 언급도 남기지 않았으며, 별 정보를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나를 알고 싶으면 나의 그림을 보라.’는 말을 남긴 채. 작품에 대한 해석은 보는 이의 몫일 뿐이다. 그림의 제목, 그 당시의 상황 등을 미루어 짐작하고 추측할 뿐. 이는 사람들이 클림트에게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작품 속 상징을 풀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갖가지 해석을 내놓았으며 동시에 제대로 풀지 못한 갈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것이 작품의 매력으로 더해진다. 독자들도 호기심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클림트의 무궁무진한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기를 바란다!

글쓴이 정유진

충북대학교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단체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 발표를 해왔으며, 갤러리스트로도 활동했다. 행복한미술심리센터에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했고, 현재 파랑새 인성교육원 대표로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