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희망을 이어준 사람

다리가 놓이면 어떤 형태로든 왕래가 일어나고 변화가 생긴다. 인생 또한 무엇과 연결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상황이라도 ‘절망’에 다리가 놓이면 매 순간 슬픔과 괴로움으로 향하지만, ‘소망’에 다리를 놓으면 우리 마음은 행복한 생각을 만들어내고, 삶도 행복해진다. 실제 그런 삶을 살아온 ‘행복한 실버 대학’ 류재용 학장이 자신의 경험담을 에세이로 전해왔다. - 편집자 주

남들은 나를 ‘자로 잰 듯 반듯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흔한 장발 단속에 걸리거나, 교통법규 한 번 어긴 적도 없었다. 스물네 살에 결혼했고, 아들딸 한 명씩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하던 사업도 잘되었기에,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나는 이대로 성실하게만 살면 행복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얼마 후, 내 인생에 원치 않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석유 가격이 폭등하면서 사업이 어려워졌다. 결국 하던 일을 접고 직장을 잡았다. 그런데 12시간씩 교대근무를 하는 자리였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어느 날은 조퇴하고 아침 일찍 왔는데 그 시각에 아내가 집에 없었다. 뒤늦게 처형이 아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는 걸 알았다. 춤을 추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만 데리고 다니라고 처형에게 여러 번 부탁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내의 잦은 외박과 가출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6월이었다. 그날도 아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몇 주가 흘렀다. 고민 끝에 처형집으로 갔다. 아내는 없었고, 처형 가족이 있었다. 그날도 처형은 아내를 찾는 내게 심한 말을 쏟아냈다. 너무 모욕적인 이야기를 듣자, 순간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래! 이렇게 사느니 다 같이 죽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휘두른 칼에 한 사람이 이미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내가…사람을 죽였구나…’ 평생 평범한 가장으로 살 줄 알았던 내가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했다.

사진 프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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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났다

재판을 앞두고 한 변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당신 같은 변호사 선임한 적 없습니다. 나는 결국 사형당할 텐데,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라고 그에게 쏘아붙이며 돌려보냈다. 사람을 죽이면 당연히 나도 죽는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후에도 변호사가 두 번 더 찾아왔지만 가서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그렇게 3개월 후, 재판을 하루 앞둔 날 다시 변호사가 찾아왔다.

“내일 재판인데 어떻게 할 거예요?”

“……”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볼 뿐이었다. 마침 나무 꼭대기에 참새 한 마리가 앉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잎이 약해서 앉으려고 하다가 날아갔다. 참새가 너무 부러웠다. 짐승보다 못한 한 인간의 무능함을 느끼며, 나는 처음으로 울먹거렸다.

“변호사님, 나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그래요. 잘해봅시다. 나,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서 온 겁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해 주었던 그 변호사 덕분에 나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교도소에 수감되어 형을 살았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살았지만

처음에는 죽지 않고 산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겼다. 매일 그날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러다 얼마 후, 갱생훈련소라는 곳에 갔다. 거기에서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발톱이 빠지고 머리가 몇 번씩 벗겨지고 처참했다. 그때부터였다. 두려운 생각들이 나를 점점 사로잡아갔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 사실 내 인생은 이미 끝났어. 10년 뒤 출소해도 내 인생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지. 부끄러워서 아이들이나 만날 수 있겠어? 누가 살인자에게 일자리를 주겠어?’ 출소해도 소망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나는 인생을 또 한 번 복수극에 내던질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 악물고 살아 나가자. 이미 망가진 인생, 나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을 해치고 내 삶도 얼른 끝내버려야지.’

하루라도 빨리 교도소에서 나가기 위해선 모범수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섰다. 종교 생활을 시작했고, 누구보다 열렬하게 금식기도를 했다. 영하 15도를 웃도는 겨울날에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한여름에도, 나는 신실한 자세로 끊임없이 금식기도를 했다. 그래서일까? 3년 후, 나는 모범수가 되어 수원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선 기독교 신우회 회장도 맡았다. 하지만 살아 숨 쉬는 매 순간 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기도하던 중에도, 설교를 듣던 중에도, 심지어 찬송을 부르다가도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 가슴 깊이 맺힌 분노 속에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미치게 괴로웠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한 사람

그러던 어느 날, 교무과장님이 집회 강사를 섭외했다고 이야기하시며 나에게 강사 목사님의 설교집 한 권을 건네주었다. 이틀 밤 동안 그 책을 읽었는데, 예수님의 보혈로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다 사해졌다는 성경의 말씀이 믿어졌다. 그 사실이 내 마음에 믿어지자, 지워내려 해도 안 되던 복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정말 이상하고 신기했다. 그 후에도 집회 강사였던 박옥수 목사님이 매달 교도소를 찾아와서 성경 공부를 했다.

당시 나는 집회에 재소자들을 모으는 일을 도왔는데, 강사 목사님이 오면 교무과에서 커피를 타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한번은 목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다.

“형제, 죄명이 뭐예요?”

순간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살인에 살인 미수입니다….”

“형제는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데… 살인을 했다고요? 거기에다가 살인 미수까지 했다고요?”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날 나는 내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모범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처음이었다. 겉모습과 달리 내 마음에 가득 차 있었던 절망과 분노를, 악한 내 속내를 입 밖으로 털어놓은 것이 말이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답했다.

“왜 생각을 그렇게만 해요? 아이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기다릴지 생각해 봤어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날에 꽃다발을 들고 가서 짜장면을 함께 먹으며 ‘장하다, 우리 아들!’ 하면서 축하해 주면 아들이 얼마나 행복해하겠어요? 아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손자가 생겨요. 할아버지가 되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요?”

“목사님, 저도 누구보다 제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라지만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당장 좋은 일들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편지로라도 ‘아들아, 너는 나에게 이렇게 기쁨을 주는구나!’ 하고 희망을 적고 꿈을 담아서 아들에게 보내 봐요. 그러면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그 말이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분명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재활용도 안 되는 세금만 축내는 사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이 끝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목사님은 ‘당신도 다시 앞날의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어.’라고 확신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후에도 목사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소망만 말했고, 그 말에는 묵직한 힘이 있었다. 마침내 굳어 있던 내 생각의 벽을 말의 힘이 부수고 들어와, 내 마음에도 희망이라는 것이 움트기 시작했다.

사진 프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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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얻은 ‘새 삶’

8월 15일, 나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10년 형을 받고 7년 2개월을 복역한 뒤였다. 출소하던 날, 언젠가 목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길을 나섰는데, 문 앞에 자동차 세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목사님이 교회 형제들을 데리고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나를 그렇게 환대해 주는 교회가 너무 감사했다.

이후, 나는 부천에서 지내며 세차하는 일을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파트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닦고, 8~10시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한숨 잔 뒤, 점심을 먹고는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가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지인의 소개로 좋은 인연까지 만나 결혼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귀여운 두 딸도 선물처럼 찾아왔다.

살면서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고, 직장에서 생각지 못한 문제를 만날 때도 있었다. 그러면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찾아왔다. ‘이건 진짜 안되겠네. 내 인생은 왜 이렇나?’ 하지만 내 생각을 믿고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가족에게, 목사님에게, 형제자매들에게 나는 수시로 조언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이 보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면서 나는 절망이 아닌, 소망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갔다.

케냐의 중범자 교도소에서 강연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2018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교정청장 포럼에도 초청을 받았다. 많은 재소자들이 출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수감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연결’이다. 내 마음에도 소망과 행복이 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누군가와 이어질 때, 변화가 일어난다. 강단의 맨 오른쪽에 서서 강연하는 사람이 필자이다. 사진제공 류재용
케냐의 중범자 교도소에서 강연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2018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교정청장 포럼에도 초청을 받았다. 많은 재소자들이 출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수감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연결’이다. 내 마음에도 소망과 행복이 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누군가와 이어질 때, 변화가 일어난다. 강단의 맨 오른쪽에 서서 강연하는 사람이 필자이다. 사진제공 류재용

또 다른 다리가 되어

2017년, 2018년에는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아프리카 재소자들을 만나러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모잠비크, 레소토, 케냐를 다녀왔는데 특히 케냐에서 만났던 재소자들이 기억에 남는다.

벽돌로 지은 허름한 케냐 교도소에 들어서니, 중범죄자 100명이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어 질문을 하나 던졌다. “여러분 가운데 10년 형을 받은 사람이 있나요? 손을 들어주세요.”라고 말하자, 손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럼 20년 형 받은 사람은 있나요?” 이번에도 침묵만 흐를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었다.

고작 10년 형을 받았던 내가 그들 앞에 서서 강연을 하려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이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두운 세계를 살고 있겠는가?’를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있었던 일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끝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자세히 설명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무표정했던 죄수들의 얼굴이 점차 밝아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렇다 할 재주도, 특별한 지식도 없지만 내 삶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긍정의 변화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죽으려고 살던 내가 덤으로 얻은 삶이 어느덧 30년이 흘렀다. 일흔이 넘은 나의 하루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다. ‘행복한 실버 대학’의 학장으로 지역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숲 체험을 떠나기도 하고, 그분들과 식사도 하며 친구가 된다.

또한 청소년 지원 사업도 담당하고 있어서 지역의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을 만나기도 하는 등 새로운 영역의 일들을 하고 있다. 절망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이 절망을 등 뒤로 돌리고 소망으로 눈을 돌릴 때, 그때 그들의 미소를 나는 가장 사랑한다.

얼마 전에 박 목사님한테 연락이 왔다. 보고 싶으니 아무 때나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날 바로 달려가 목사님을 만났다. 나와 가족의 안부를 묻더니 고맙다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어안이 벙벙했다.

돌아보면, 나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다. 이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내게 일어난 일들을 말하는 것. 죽은 것 같이 살던 내게 소망의 다리를 놓아준 고마운 분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소망의 다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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